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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재심 열릴까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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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4-18 14:25:26 수정 : 2024-04-18 14:2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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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서윤홍 전 대법관이 9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언론은 부고를 전하며 고인의 10·26 사건 상고심 재판 당시 행적에 주목했다. 경북대 법대를 졸업하고 1956년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판사가 된 고인은 전주·대전·대구지법원장을 거쳐 유신 정권 말기인 1979년 4월 대법관(당시 명칭은 ‘대법원판사’)에 임명됐다. 그로부터 6개월 뒤인 1979년 10월26일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했다. 계엄령이 내려진 가운데 군검찰은 김 전 부장을 내란 혐의 등으로 기소했고 1·2심 모두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듬해인 1980년 사건은 마침내 대법원 재판에 회부됐다.

 

1979년 10·26 사건 이후 내란 목적 살인 등 혐의로 법정에 선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세계일보 자료사진

대법원장과 대법관 모두가 참여하는 전원합의체가 열린 가운데 그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다수는 김 전 부장이 박 대통령을 시해한 행위를 ‘내란 목적 살인’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내란죄를 인정한 항소심 판결을 그대로 받아들여 상고를 기각하자고 했다. 반면 고인을 비롯한 소수의 대법관은 “내란이나 국헌문란 목적의 살인으로 볼 수 없다”며 “일반 살인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내란죄가 성립하려면 어느 한 지역의 평온을 해치기에 충분한 폭동을 일으킬 만한 다수인이 동원되어야 하는데 10·26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사실상 김 전 부장 혼자 일으킨 사건 아니냐는 뜻이다.

 

결국 고인과 더불어 양병호 민문기 임항준 김윤행 정태원 총 6명의 대법관이 소수의견을 냈다. 대법관 8 대 6 의견으로 내란죄를 적용한 다수의견이 확정되었음에도 군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당시는 박 전 대통령 사후 정권을 잡은 전두환 장군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제5공화국 출범을 준비하던 때였다. 서슬이 시퍼런 군사정권 앞에서 사법부는 무력하기만 했다. 1980년 소수의견을 낸 고인 등 5명의 대법관이 청와대에 사표를 제출해 즉각 수리됐다. 소수의견에 가담한 6명 중 유일하게 사표를 내지 않은 정태원 전 대법관은 이듬해인 1981년 5공 헌법에 따라 대법원이 재구성될 때 재임명에서 탈락했다. 대법관 취임 후 고작 1년 만에 법복을 벗은 고인은 그 길로 낙향해 평생 대구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서울고법 형사7부(재판장 이재권)가 17일 김 전 부장의 내란 목적 살인 등 재심 사건 첫 심문 기일을 열었다. 이는 2020년 김 전 부장 유족이 재심을 청구한 데 따른 것이다. 유족 측 변호인단은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는 김 전 부장의 최후진술을 인용하며 “자유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부득이한 살인이었다는 판단을 받고자 한다”고 재심 청구 취지를 설명했다. 재판부가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릴 지 여부는 현재로선 알 수 없으나, 굴곡이 심했던 만큼 역사적 인물의 평가도 극에서 극으로 갈리는 한국 현대사를 떠올리며 착잡한 심정을 금하기 어렵다. 1979년 이후 강산이 네 번 넘게 변할 세월이 흘렀어도 이른바 ‘과거사’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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