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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8월25일 배석(裵錫) 대법관이 별세했다. 당시 나이 58세로 환갑도 되기 전이었다. 전두환정부 말기인 1987년 3월 대법관에 임명된 고인은 6·10 민주 항쟁과 노태우정부 출범으로 이듬해인 1988년 사법부가 대폭의 물갈이를 겪을 때에도 유임했다. 대법관으로서 실력을 인정받고 또 정치적 중립을 지킨 결과였을 것이다. 하지만 대법관 취임 후 격무에 시달리면서 지병인 당뇨병이 급격히 악화했다고 한다. 대법관으로 일한 지 4년여 만인 1991년 8월10일 건강을 이유로 청와대에 사의를 밝히고 나서 불과 보름 만에 유명을 달리했다. 법원 안팎에선 “수명(壽命)을 깎아 판결문을 썼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에서 열린 신임 법관 임명식 광경. 대법원 제공

‘판사가 판결문만 안 쓰면 참 좋은 직업’이란 말이 있다. 법관 업무의 거의 대부분이 판결문 작성이란 현실을 반영한다. 또 판결문을 쓴다는 게 그만큼 어려운 일이란 점도 보여준다. 사실 판결문이 꼭 길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송 당사자들은 내가 왜 이겼는지, 아니면 졌는지를 판결문을 통해 확인하고 싶어한다. 재판 결과에 따라 수년간 징역살이를 해야 할 수도 있는 형사 사건의 경우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과거 70글자가 조금 넘는 짧은 판결문을 썼다가 ‘트위터 게시물이냐’라는 비판을 들은 어느 법관이 재임용에서 탈락한 일이 있었다. 판사의 무성의가 대중을 분노하게 만든 사례라 하겠다.

 

대법원에는 대법관을 보좌하는 재판연구관이 있다. 이 연구관들이 하는 업무 태반이 판결문 작성 보좌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 연방대법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 대법관 명의의 판결문 초안을 우리 재판연구관에 해당하는 ‘로클럭’(law clerk)이 쓴다고 한다. 요즘은 대법원 말고 하급심 법원에도 이른바 ‘재판연구원’이 배치되는데 그들 또한 판결문 작성 업무에 시달린다는 후문이다. 몇 해 전 어느 신문은 서울고법에서 일하는 재판연구원들의 애환을 소개하며 ‘판사 대신 판결문 초안을 쓰느라 녹초가 돼 있다’는 취지로 보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서울 서초동에 있는 서울법원종합청사 전경. SNS 캡처

17일 모 언론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서 조희대 대법원장이 ‘몰라서 걸어온 그 길, 알고는 다시는 못 가’라는 어느 대중가요 가사를 인용해 눈길을 끈다. 조 대법원장은 “처음엔 몰라서 했지만 겪고 나면 못 한다는 내용”이라며 “재판연구관을 할 때 주말에 아픈 몸을 이끌고 다음 날 내야 하는 보고서를 한 페이지씩 넘길 때 이 가사가 생각나더라”고 했다. 법원 밖에서는 판사가 됐다고 하면 그저 ‘꽃길’이라고 여기겠으나, 법관도 초년병 시절에는 무척 힘들다는 점을 설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사건 기록을 깨알같이, 악착같이 봐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며 “법조 경력 3∼5년 된 젊은 인재가 가장 잘하는 일”이라고도 했다. 행여 판사를 지망하는 법학도들이 ‘그 정도로 고생한다는 말인가’ 하며 목표를 바꾸는 건 아닌지 살짝 걱정된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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