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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시민은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류애 가져야” [차 한잔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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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6-17 21:31:05 수정 : 2024-06-17 23: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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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첫 女 유네스코 본부 국장’ 최수향 박사

“내가 타국에 미칠 영향 떠올려
‘글로컬’한 태도 지니는 것 필요”
20여년 근무 경험 담은 책 출간
“도서 판매 수익 모두 기부할 것”

“세계 시민에 대한 한 가지 정의는 없어요. 핵심은 언어, 역사, 정치, 경제, 종교를 다 떠나서 작동하는 인류애, 공동 운명체라는 의식을 갖는 것이죠.”

 

전 세계의 교육, 과학, 문화 보급과 교류를 위해 설립된 국제기구 유네스코에서 23년을 근무한 최수향 박사는 세계 시민의 개념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여러 나라를 여행하거나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하는 건 세계 시민의 요건이 아니다. 

 

유네스코에서 은퇴한 뒤 반려동물, 예술 활동과 함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최수향 박사가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자택에서 국제기구 직원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세계 시민이라는 건 경험보다는 정신과 행동의 문제”라고 한 최 박사는 “외국에 가지 않더라도 내가 타국에 미칠 영향에 대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생각은 세계적(global)으로 하되 행동은 내 집 앞에서부터(local) 하는 ‘글로컬’한 태도”를 강조했다.

 

20여년 국제기구에서의 치열한 삶을 돌아본 책 ‘나의 글로벌 직장 일기’를 펴낸 최 박사를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그의 집에서 만났다. 2022년 1월 은퇴 후 약 2년 만에 나온 책에는 ‘유네스코 본부 국장에 오른 최초의 한국 여성’이란 수식어 뒤 화려할 수만은 없는 국제기구 직원의 현실과 고뇌가 담겼다. 

 

◆국제기구 직원에게 필요한 의식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것이 흔히 국제기구를 꿈꾸는 이들의 이상이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불편함을 의식할 필요도 있다는 게 최 박사의 생각이다. 

 

유네스코에서 은퇴한 뒤 반려동물, 예술 활동과 함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최수향 박사가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자택에서 국제기구 직원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그의 경우 “국제기구 직원의 삶에 쳐진 보호막 안에서 도덕적으로 느끼는 괴리감”에 괴로움이 컸다. 최 박사는 “내가 정말 저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건지 아니면 그걸 명목으로 내가 편안히 사는 건지 계속해서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 박사에 따르면 현지 사회에 밀착해서 도움을 주는 비영리기구(NGO)나 자원봉사자들도 기회가 되면 국제기구 같은 더 큰 조직으로 오려고 한다. 직장으로서 국제기구의 혜택이 크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어서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일을 하면서 내가 편히 사는 것에 대한 상당한 불편함이 있었어요. 그것을 알고 들어가야만 내 행동에 조금이라도 조심하고 함부로 하지 않는 의식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그가 은퇴하기 직전인 2021년 아프가니스탄이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테러단체 탈레반의 손에 들어갔을 때는 “지금껏 해 온 일이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은 절망감을 느꼈다”고 했다. 최 박사는 “여성 권리 문제도 그렇고 수많은 국제기구가 한 사회를 바꿔보려고 노력했는데, 정치적 격변으로 한순간에 무너지면서 시계가 거꾸로 가는 사례를 보면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국제기구 고위급 직원의 한마디에 부여되는 권위, 넓은 세상을 무대로 매순간 배움의 기회로 가득찬 일터를 갖는다는 것은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장점이자 특권이다.

 

국제기구의 일은 장기적으로 진행되는 개발(development)과 재해·재난 때 투입되는 원조(humanitarian work) 사업으로 크게 나뉜다. 이 중 원조의 경우 홍수나 전쟁 중인 곳에 가서 식량 지원 등을 하는 일이라 보람을 좀 더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고 최 박사는 전했다.

 

◆어떤 사람이 국제기구에 적합할까

 

최 박사가 책을 쓴 것은 청년들에게 “삶에는 ‘우연의 여신’이 있음을 알려주고, 지그재그 길이라도 얼마든지 괜찮다. 한 발 뒤로 가더라도 두 발 앞으로 가면 되는 것이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서였다.

 

20대 때 해외에서 공부하며 박사 학위를 받은 그 역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던 시절이 있었다. 유학을 마치고 유네스코에 들어가기까지 7년이 걸렸다. 그 사이 한국에서 교육개발원에 첫 직장을 잡기도 했지만 한국과 캐나다를 왔다 갔다 하며 불확실한 운명에 종종 불안해하던 시간이었다.

 

결국 국제기구에 정착한 최 박사는 자신의 한국 직장에서의 경험을 돌이켜보며 “한국 사회가 관계지향적(relationship-oriented) 사람에게 유리한 면이 있다면 국제기구는 업무지향적(task-oriented) 사람에게 보다 더 적합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교육개발원에서 일할 때 관리들을 대하는 자세가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자신을 상사들이 힘들어했다는 일화를 전했다. 한국 사회에서 어딜가나 출신 대학을 묻고 명문대를 따지는 문화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반면 국제기구에서는 “거기도 권력 관계가 있고, 힘 있는 나라 출신이 있지만 의식적으로 누르려는 조직의 경향이 있기 때문에 겉으로 표현하는 건 금기시된다”며 “일하는 내내 데리고 있는 직원들의 대학교를 물어본 적도 없고, 그냥 한 사람의 개인으로 살 수 있었던 게 참 좋았다”고 말했다.

 

책에서 ‘결혼보다 경제적 독립’을 강조하기도 했던 최 박사는 비혼 여성 선배로서 후배 여성 청년들에게 뼈 있는 조언을 남기기도 했다. 

 

“직업이라는 것을 진짜 나 스스로를 먹고 살리는 일이라는 절박한 의식 하에서 가졌으면 해요. 아직은 문화적으로 여성이 경제적 자립권에 대해 남성만큼 긴박감이 없는 것 같거든요. 밥벌이라는 게 얼마나 죽고 살 일인지, 내 능력으로 나를 책임져야한다는 의식이 더 확고하면 직장이나 사회에서도 목숨 걸고 덤비지 않을까 싶어요.”

 

최 박사는 은퇴 후 여유로워진 일상 상당 부분을 반려견 디디와 함께 보내는 데에 쓰고 있다. 국제기구에서 일하며 잦은 출장과 바쁜 업무 등으로 디디를 기다리게 했던 시간이 많았기에 남은 시간이나마 그것을 보상하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물질적 욕망, 직함 있는 인생을 내려놓기

 

책 판매 수익을 모두 기부할 것이라는 최 박사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돈을 더 쓰고 싶지 않다”며 “연금으로 생활이 가능한데 그 외에 생기는 돈으로 맛있는 것을 사먹고 하는 것이 죄책감이 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 인생의 3분의 1밖에 안 남았는데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다 왔니’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할 말이 없는 것이 두렵다”고 덧붙였다.

 

“어떤 인생이 잘 산 인생이냐 할 때 저는 직업을 떠나서 죽는 순간에 ‘돌아보니 괜찮았다’는 감정이 든다면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는 저는 잘 살았어요. 근데 점점 떠날 시간이 가까워오는데 정말 후회가 없을까에 대해선 자신이 없어요. 살면서 힘든 사람을 너무 많이 봐 왔는데, 내가 저 사람들한테 무슨 도움을 줬을까 질문하는 건 너무 당연하지 않을까요?”

 

이런 성찰은 그가 “물질적 욕망은 어느 순간에는 끊어주는 게 필요하다”고 여기게 된 배경이다. 기본적인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하는 이상으로의 물질은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고, 오히려 행복을 뺏어갈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끊임없이 물질적 성취를 비교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런 실천을 하기는 쉽지 않다는 말에도 최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본력으로 서로를 평가하는 것 외에도 직함을 가져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한국 사회의 전형성 추구는 ‘명함 없는 은퇴자의 삶’을 지향하는 최 박사에게 여간 골치가 아니다. 그가 이룬 사회적 성취로 볼 때 그저 나이 든 반려견과 하루를 보내고, 서예나 그림에 몰두하는 생활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느낌에 답답할 때가 많다고 한다.

 

“일은 원 없이 했고, 다른 인생을 한번 살아보고 싶어요. 제 주변 유네스코 은퇴자들은 이걸 당연하게 생각해요. 식당 차린다고 요리 배우고, 강아지 데리고 여행을 다니거나 독수리 보호 단체 활동에 빠져있고 그래요. 커리어를 이어가며 ‘모습’을 갖춰야만 한다는 데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글·사진=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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