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전방 경계초소(GP)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들린 건 새벽 2시30분 무렵이었다. 오늘로부터 19년 전인 2005년 6월19일 경기도 연천군 소재의 한 육군 보병사단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소대원 8명이 숨지고 4명이 중상을 입은 대형 사건이었다. 범인은 그 날 선임과 함께 야간 초소에서 근무를 서고 있었던 김일병 이었다. 군 관계자에 따르면 김 일병은 이날 경계 진지 근무 마감 시간 15분 전, 함께 근무하던 선임병에게 “다음 근무자를 깨우겠다”며 내무반으로 들어갔다. 김 일병은 그곳에서 잠자던 소대원들에게 수류탄을 던진 뒤 경계초소 곳곳을 돌아다니며 소총으로 44발을 난사했다.
‘총기난사 참극’ 발생 3일 후인 22일 경기 연천군 중부전선 530GP 내무반은 끔찍한 비극의 현장이었다.
주인을 잃은 시계와 깨진 형광등 조각, 침상위에 어지럽게 널려진 매트리스와 배개 등이 당시의 끔찍한 ‘생지옥’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10여평 남짓한 내무반 바닥과 침상 곳곳에는 수류탄 파편과 실탄에 맞아 사망한 희생자들이 흥건히 흘렸던 피가 그대로 말라붙어 있었다.
내무반 입구 바닥에서는 이 자리에서 숨진 차유철 상병의 군번줄(인식표)이 주인을 잃고 피범벅이 된 채 발견돼 가슴을 찡하게 했다.
또 희생자들의 개인 물품을 보관하는 관물대에는 연인, 또는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만 덩그러니 붙어 있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가장 처참한 현장은 김 일병이 수류탄을 던져 가장 처참하게 희생을 당한 박의원 상병이 누워 있던 자리다. 매트리스와 모포는 피가 범벅이 된 채 침상과 함께 폭발로 인해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군 수사관계자는 “사건 직후 현장을 검증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 박 상병이 폭발 충격의 50∼60%를 흡수했다”고 전했다.
북한군 초소와 불과 수 백m를 사이에 두고 위치한 530 GP는 적과 대치하며 긴장된 근무로 인해 ‘육지의 섬’으로도 불린다.
당시 군 당국은 김일병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짓고 사건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후 김 씨는 2008년 사형 확정 판결을 받고, 경기 이천 국군교도소에 수감 됐다.
당시 피해 유족들은 사건의 배후에 북한이 있다는 의혹을 꾸준히 제기했다.
2007년 9월 28일 연천군 총기사건 유가족 대책위원회는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GP 옥상 등에서 차단작전을 수행하다 북한의 미상화기(RPG-7) 9발의 공격을 받아 8명의 군인이 사망한 사건을 국방부가 가짜 범인을 내세워 은폐·조작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전문가들이 사상자의 상처가 총이나 수류탄이 아닌 파편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며 “수류탄 파편 흔적이나 혈점이 없어 수류탄이 폭발한 것으로 볼 직접적인 증거도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국방부 관계자는 “이미 여러 차례 검증을 통해 결론이 났고 김 일병도 범행 동기를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다”며 “수류탄과 총격으로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서 GP의 오인 보고가 있었지만 조사 과정에서 모두 해명됐다”고 밝혔다.
이후에도 연천 530 GP 사건은 북한 소행이라는 주장이 계속됐다.
연천530GP진상규명촉구국민협의회는 2014년 19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530GP피격 사건은 북한군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연천530GP 사건에 대해 ▲고인들의 유품인 전투복을 사고 직후 소각해 이를 받은 유족이 한 명도 없다는 점 ▲반납총기 22정이 부족한 점 ▲생존한 부상자 4명에게서 총상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점 등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김 일병 사건은 2017년 3월 25일 12년만에 재수사가 결정돼 진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재수사 당시에도 피의자 김씨는 “내가 저지른 사건이 맞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한 김 일병. “네가 범인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유족. 김 일병의 말에 기울어진 ‘디케의 저울’은 맞는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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