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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된 예술품 알리겠다”…조선민족미술관 설립 100주년 [일본 속 우리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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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6-22 13:00:00 수정 : 2024-06-22 13: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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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6월, 경성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한 일본인이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조선민족미술관을 세워, 조선인의 위대한 예술품을 수집함으로써 여러분의 영광을 세계에 소개하려고 한다.”

 

조선의 “영광된 예술품”이 외국인의 손으로 넘어가는 현실을 꼬집으며 “현재의 여러분으로서는 그것을 돌볼 여유가 없을 지 모르나 10년, 20년 후에 반드시 통한의 기억을 버릴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조선민족미술관은 강연 3년 뒤인 1924년 4월 경복궁 집경당에 문을 열었다.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의 바람이 현실이 된 것이다. 올해로 꼭 100년이 된 이야기다.   

 

일본 도쿄 일본민예관이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특별전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선민족미술관’을 8월까지 개최한다. 조선의 예술을 깊이 애호했던 야나기는 조선의 가장 훌륭한 벗이길 자처했던 인물이다. 말만 그랬던 게 아니라 그에 걸맞은 실천을 이어갔다.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은 실천의 대표적 성과다.  

일본 도쿄 일본민예관의 특별전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선민족미술관’.

◆경복궁에 일본이 세운 조선민족미술관

 

야나기는 1914년 ‘백자청화초화문각병’과의 만남으로 조선미에 눈을 떴다. 조선도자기 연구자로 훗날 조선민족미술관 설립, 운영에 동참한 아사카와 노리타카의 선물이었다. “차가운 도기에서 인간의 따뜻함, 고귀, 장엄을 읽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1916년 8월, 첫 조선 여행 이후 1940년 10월까지 그는 21번 조선을 찾았다. 각종 미술품을 수집, 연구하며 조선미에 대한 애정을 키워가는 여정이었다. 예술에 대한 애호는 그것을 만들어 낸 나라, 민족에 대한 존경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게 야나기의 생각이었다. 조선을 위한 실천에도 적극 나선 이유였다.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비판한 ‘조선인을 생각한다’를 1919년 5월 요미우리신문에 게재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의 현실을 걱정하고, 조선인의 아픔에 공감한 글을 잇달아 발표했다. 조선, 일본에서 전시회도 잇달아 열었다. 1921년 도쿄에서 연 ‘조선민족미술전람회’는 “조선시대 미술과 공예를 대상으로 한 세계 최초의 전람회”였다. 이듬해 경성 황금정(지금의 을지로)에서 개최한 ‘이조도자기전람회’는 “조선 땅에서 열린 첫 조선도자기 전시회”라고 한다.  

 

하이라이트는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이다. 일본민예관은 “1920년 (야나기의 집이 있던 지바현) 아비코를 방문한 아사카와 다쿠미(노리타카의 동생)과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을 계획했다”고 소개했다. “도쿄가 아닌 경성에 미술관을 세워 ‘민족예술’로서 조선의 맛이 우러나오는 작품, 잊혀진 조선시대의 작품에 초점을 맞추어 수집해 가치를 묻고, 나아가 새로운 작품에 대한 자극을 조선민족에게 호소하는 기관”이 되길 바랐다. 

 

이후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을 위한 활동을 벌였다. 강연회, 음악회, 저술활동 등을 통해 얻은 자신의 수입을 내놨고, 후원을 요청했다. 일본인들이 호응했고, 독립운동가 백남훈, 김준연, 백관수, 동아일보사 장덕수, 기독교 지도자 조만식 등이 후원에 참여했다.

조선민족미술관으로 활용된 경복궁 집경당. 궁능유적본부 홈페이지
1924년 4월 개관 당시 조선민족미술관 전시실 모습. 일본민예관 제공

조선민족미술관은 조선시대 도자기를 중심으로 목공예품, 금속공예품, 회화, 조각 등 약 1000점을 소장하고 있었다. 1년에 두 번 전시회를 열었고, 나머지 시간에는 관람을 희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공개했다. 관리는 경성에 살았던 아사카와 형제가 맡았다. 개관 당시 전시실을 찍은 사진을 통해 이제는 일본민예관 소장품이 된 전시품이 일부 확인됐고, 이번 일본민예관 특별전에 출품됐다.     

일본민예관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선민족미술관’ 특별전 전시물. 

1945년 해방과 함께 조선민족미술관은 문을 닫았다. 소장품은 국립민족미술관으로 이관되었다가 국립박물관 남산분관으로 넘어갔다. 6·25 중 일부 손실되었지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으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일본민예관은 “국립중앙박물관 온라인데이터베이스를 조사한 결과 조선민족미술관이 소장했던 것으로 보이는 작품은 200점 가까이 된다”며 “실견 조사가 필요한 것도 많아 앞으로의 과제”라고 밝혔다. 

 

◆“비참한 역사 속 조선인, 신이 보살필 것”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으로 대표되는 야나기의 조선 예술에 대한 인식, 실천에는 최상급으로 표현된 찬사와 애정이 넘친다. 그의 글과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가슴이 웅장해지는 이유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서는 매우 불편하다. 조선 예술이 이뤄진 토대인 한국사에 대한 야나기의 오해 혹은 편견 때문이다. 한·중·일 3국의 역사, 자연환경을 비교한 데서 이런 점이 뚜렷하다.

 

야나기는 중국의 역사를 “거대한 공간 위에 일어난 위대한 흥망의 역사”라고 했다. 그것에 바탕을 두고 “깊은 사색과 종교가 성하고 위대한 문학, 시가가 나타나고 건실한 회화의 공예가 뒤를 이었다”고 판단했다. 모국 일본에 대해서는 “고도(孤島·일본열도)는 하나의 낙원이었다. 생활에 여유가 있고 사람들이 정취에 빠져 있는 이 나라에서처럼 기호로 시간을 즐기는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다”고 자부했다. 조선을 두고는 “대륙도 섬도 아닌 반도라는 사실이 이 나라 운명의 방향을 정했다”며 “끊임없는 외국의 압박으로 나라의 평화는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백성은 힘 앞에 굽힐 것을 강요당했다”고 평가했다. 그가 보기에 조선사는 “어둡고 비참하고 때로는 공포에 가득찬 역사”, “사대를 강요당한 역사”였다. 

 

세 나라 각각의 역사, 자연환경은 그만큼 다른 예술을 낳았다. 중국은 ‘의지의 예술’, 일본은 ‘정취의 예술’이고 조선은 ‘비애의 운명을 짊어진 예술’이라고 평가했다. 조선의 비애미를 잘 보여주는 걸로 선을 꼽았다. 야나기는 한 점에서 다른 한 점을 이어 만들어지는 선을 “헤어지는 마음”으로 해석하며 “피안을 찾아 땅에서 괴로워하는” 조선인이 고독한 선을 낳았다고 생각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인식이 당대에 흔했던 조선에 대한 경시나 경멸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야나기는 조선, 조선인의 현실을 동정했고 나름의 위로, 격려를 전하려 했다. 종교철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신이 조선을 보살필 것이라 했다. 

 

“조선의 벗이여, 그 운명을 무익하게 저주해서는 안된다.…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 민족을 학대하더라도 오직 배반하지 않는 자가 있다. 그가 다름 아닌 만능의 신이라고 믿어도 좋다. 신보다 훌륭한 동조자가 어디 있겠는가.”(‘조선의 미술’, 1922년)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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