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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얇은소설] 누구에게나 ‘막다른 골목’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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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6-27 23:09:04 수정 : 2024-06-27 23: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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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짝사랑 12년 이야기
격정적 마음, 상대 몰아붙여
되레 달아나게 만들기도 해
교감의 거리 소중함을 느껴

이토야마 아키코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에 수록, 권남희 옮김, 작가정신)

사람은 자신에게 없거나 부족한 면을 가진 타인을 부러워한다고 하는데, 내 경우에 그 대상이 ‘작가’라면 이런 부류를 내심 부러워하곤 한다. 어려운 단어나 문장을 쓰지도 않으면서 복잡한 관계나 감정을 술술 표현하는 작가, 간절하고 애가 타는 이야기를 쓰면서도 태연하고 예사롭게 그리는 작가. 첫사랑, 짝사랑, 작가 지망생, 청춘, 재즈 바 같은, 내 좁은 생각으론 진부해 보일 수도 있는 키워드들로 인생의 묵직한 한 부분을 드러내 보여주는 작가들. 많은 작가 중에서도 이토야마 아키코는 위에 열거한 점들을 조금씩은 다 갖추고 있는 작가라고나 할까. 특히 “절묘한 거리”를 둔 사랑의 이야기에서는.

조경란 소설가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의 줄거리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그녀가 고등학교 일 년 선배인 다카시를 짝사랑한 십이 년 동안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모른다는 불확실한 표현을 한 것은 두 인물의 관계를 그렇게 단순하게만은 표현할 수 없는 데다 소설이 진행될수록 사랑에 관한 정의가 달라지는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녀가 핸섬하지만 죽은 물고기를 조금 닮기도 해서, 만지면 미끈거리고 차가울 것 같은 다카시를 보고 첫눈에 반해 들끓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사랑의 형태가.

그녀는 대학에 입학했고 다카시는 입시에 실패했다. 입사 후 그녀는 오사카로 발령이 나서 거처를 옮겨 지냈고 친구 결혼식 때문에 몇 년 만에 도쿄에 왔다. 버스 안에서 누군가 그녀에게 “네가 정장 차림으로 회사를 다니다니”하고 말하며 웃었다. 다카시, 그녀가 잊은 적이 없고 퇴근하는 길이나 달을 볼 때마다 떠올렸던 사람이. 그녀가 “무슨 일을 해요?”라고 묻자 다카시는 글을 쓴다고 대답한다. 어떻게 작가가 되려고 생각했냐고 다시 묻자 “그야, 나밖에 쓸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지”라고 다카시가 말하는 순간 그녀는 “얼마나 무모한가, 얼마나 근사한가. 지금도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당신은, 이제야 반짝반짝 빛을 내기 시작한다”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우연히 다시 만났다고 해서 이 짝사랑이 수월해지지는 않는다. 다카시는 잡으려고 하면 달아나고 몰아세우려고 하면 숨어버리는 사람이니까. 그런 다카시에게 오래 연락이 오지 않는다. 골절상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녀는 오사카에서 도쿄의 병원까지 시속 160㎞로 달려 도착했다. 그 후 두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 이야기를 많이 주고받는다. 사랑과 섹스와 돈 이외의, 확실하지 않은 두 사람의 관계 이외의 이야기들에 대해서. 그녀는 이제 자신이 다카시의 팬이 되었다고 느낀다. 그가 어서 공모전을 통과해서 진짜 작가가 되기를 누구보다 바라는 팬. 아니면 “애인 미만 가족 이상”의 관계. 결혼은 하지 않았는데 장례식은 치러 줄 사람.

거의 이십 년 전에 읽었던 단편을 다시 읽으니 이 소설의 ‘막다른 골목’은 세 가지 의미로 보인다. 첫 번째는 다카시가 모친과 조용하게 사는 실제 집의 위치, 두 번째는 사랑이나 불만족, 질투를 거침없이 표현해 상대를 몰아붙이는 감정적 의미, 세 번째는 두 사람만이 알 수 있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교감의 거리. 이 단편의 풋풋한 매력은 첫 번째에서 세 번째로 이동하는 ‘막다른 골목’의 변화에 있지 않을까. 문득 실패한 사랑의 경험이 떠오른다. 아마도 두 번째, 내 감정에 못 이겨 상대방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붙여서였을 수도.

다카시의 소설이 이차 예선을 통과한 날 두 사람은 축하 술을 마셨고 취한 다카시는 그녀 집에서 잠이 들었다. 그녀는 차를 마시며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린다. 아직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사랑의 대상을. 예전처럼 그를 ‘막다른 골목’ 안쪽으로 몰아세우는 일은 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알아차린다. 자신의 “조용한 마음”을. 미미한 온도로 지속되며 헐렁하고 가볍고 시시해 보이지만 소중하다고 느끼게 되는, 그래서 소설이 끝날 때 독자가 미소 지으며 그들의 관계를 응원하고 싶게 만드는 이런 이야기, 드물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 일본 서점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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