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왼쪽 볼에 콩알만 한 상처가 났다. 손톱 끝이 깨진 줄 모르고 얼굴을 긁어댄 탓이었다. 상처는 작았지만 눈에 띄게 빨갰고 피부가 벗겨진 부위가 상당히 쓰라렸다. 나는 집 앞 약국으로 향했다. 소아과 건물에 위치해 항상 유아차와 킥보드로 복작복작한 곳이었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면 무표정한 얼굴의 약사가 깃이 반듯한 가운을 입고 나타나곤 했다.

약사는 내 상처를 살펴보고서 적당한 사이즈의 습윤 밴드를 내주었다. 항생제 연고 발라도 되나요? 내가 묻자 굳이, 라고 말했다. “이렇게 얕은 상처는 굳이 연고 안 바르셔도 돼요. 진물 날 때 밴드 붙여두면 흉터 없이 금세 아물어요.” 약사가 높낮이 없는 어투로 답하고는 조제실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직원에게 카드를 건네면서 나는 얇은 벽으로 가로막힌 조제실을 넘겨다보았다.

나는 건물 엘리베이터에서 약사를 흉보는 사람과 몇 번이고 마주쳤었다. 그들은 모두 다른 얼굴로 모두 비슷한 말을 했다. 약사가 무뚝뚝하고 불친절하다는 내용이었다. “소아과 환자가 대부분인데 곰살맞은 구석이 하나도 없어. 저쪽 약국은 애들한테 비타민도 하나씩 쥐여주고 그러는데 여기는 본체만체야.” 그들의 불평은 대개 ‘동네 장사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지’로 끝났다. 안 된다는 말에 비해 약국은 8년째 성업 중이었다. 나도 그 약국을 자주 이용했다. 시판약을 구매할 때에도 일일이 증상을 확인하고 복용법을 지도해주는 건 이곳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약사는 약상자 겉면에 네임펜으로 1일 2회, 식후 복용 같은 글자들을 커다랗게 써주곤 했다.

내가 약사를 신뢰하는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번은 약국 앞에서 열살쯤 되는 남자아이가 넘어진 일이 있었다. 아이가 탄 자전거가 보도블럭에 앞바퀴를 세게 부딪히더니 순식간에 옆으로 누워버렸다. 시멘트 바닥에 길게 쓸린 아이 종아리에 피가 번지기 시작했다. 아이의 손바닥도 팔꿈치도 온통 쓸린 상처 투성이었다. 약사는 생수병을 갖고 나와 아이의 종아리와 손바닥을 물로 씻어낸 뒤 아이를 데리고 약국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그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아이를 달래는 법도 없이 묵묵히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의 자전거를 세워 약국 앞에 끌어둔 뒤 가던 길을 갔다. 그 모든 과정이 기이할 만큼 고요하고 차분하게 이루어졌다. 약사는 무뚝뚝했지만 필요한 곳에는 반드시 손을 내미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 약사가 친절하지 않은 것이 좋다. 약사가 높은 억양으로 말꼬리를 늘이면서 말하지 않는 것이, 보고 있는 내 뺨이 저릴 정도로 종일 웃고 있지 않은 것이, 의무적으로 서비스 상품을 내놓지 않는 것이 나는 좋다. 언제부터 우리는 과도한 친절을 당연시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어쩌면 친절을 틀에 맞춰 학습한 뒤 무한재생하는 것에 불과할지 모르는 데도 말이다. 타인을 보살피는 마음과 성실함. 약사에게 그보다 좋은 덕목이 또 있을까 싶다.


안보윤 소설가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손예진 '상큼 발랄'
  • 손예진 '상큼 발랄'
  • 이채연 '깜찍하게'
  • 나띠 ‘청순&섹시’
  • 김하늘 '반가운 손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