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사람 만나기 좋아해
동네 돌아다녀 ‘영주 백바꾸’ 별명
고2 때 어머니 잃은 슬픔에 출가
자연스레 익힌 사찰음식 수행 전념
넷플릭스 출연… “셰프의 셰프” 명성
전세계에 ‘한국의 맛’ 알리기 앞장
사계절 달라지는 제철 식재료 탐구
나를 알아가는 수행 과정과도 같아
따뜻한 한끼 식사, 소통하는 기회
가정·직장에서 혼밥 만연 안타까워
# 지난달 19일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한국문화원. 브뤼셀 주재 각국 대사 배우자 20여명이 전통 한식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앞치마를 두르고 모였다. 한국문화원 요청에 브뤼셀로 날아간 정관 스님(68·백양사 천진암 감원)이 먼저 김치와 된장, 간장 등 전통 한식에 대해 소개했다. 이들은 특히 메주가 발효해 본래 맛과 특성을 넘어 아주 새로운 된장이나 간장이 되는 과정에 호기심을 보였다. 정관 스님이 “장은 한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오랜 시간 발효를 통해 음식에 깊은 맛을 더한다”며 “한식은 단순히 배를 불리는 과정이 아닌 우리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하자 놀라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정관 스님은 마늘과 파, 젓갈 등이 들어가는 전통 김치와 그런 자극성이 강한 재료를 넣지 않는 사찰 김치의 차이도 비교해 보여줬다. 그러면서 토마토와 파프리카 등 현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김치 만드는 과정을 시연했다. 전통 김치는 해외에서 재료를 준비하기 힘들고, 외국인들이 매워서 부담스러워 하니 샐러드처럼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도록 사찰 김치 담그는 법을 전수한 것. 김치 등 정관 스님의 정성이 담긴 다양한 음식을 맛본 참석자들은 한식의 매력에 홀딱 반해버렸다. 유럽지역 한 대사 부인은 “어렸을 때 고향 집에서 할머니와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차린 음식을 함께 먹었던 장면이 떠올랐다”며 고마워했다.
# 이달 11일 저녁 미국 뉴욕 맨해튼 고담홀. 조계종과 주뉴욕 대한민국총영사관이 현지 정관계·문화예술계·종교계 주요 인사 300여명을 부른 ‘VIP초청 만찬’ 현장. 정관 스님이 수삼 튀김과 표고버섯조청조림, 방울토마토 장아찌, 차조밥, 능이버섯뭇국, 송화다식, 무화과 정과, 백양사 차 등 사찰음식을 대접했다. 감탄사를 연발한 참석 인사들은 “사계절 제철 재료에다 자연에서 나온 양념으로 순수한 맛을 살린 사찰음식은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삶의 철학을 담고 있다”는 정관 스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날 행사 전후로 뉴욕 한국문화원에서 ‘사찰음식 명상’과 ‘사찰음식 요리’ 강습도 두 차례 열었다. 한식을 처음 접하는 외국인 등 현지 참가자들이 음식과 삶의 관계에 대해 깊이 성찰하도록 하면서 나물과 두부, 간장, 된장 등을 활용해 건강하고 간소한 음식을 직접 만들어보게 했다. 호응이 뜨거웠다
‘사찰음식 명장’ 정관 스님의 손맛이 다시 한 번 빛난 순간들이다. 대한불교조계종은 사찰음식 전승·보존·대중화에 탁월한 업적을 세운 스님에게 2016년부터 사찰음식 명장 칭호를 주고 있다. 선재·계호·적문·대안·정관·우관 스님 등이다. 이 중에서도 정관스님의 명성은 독보적이다. 그는 40여년 간 ‘사찰음식을 하는 수행자’로 활동하며 10여년 전부터 사찰음식 세계화에도 앞장섰다. 2017년 넷플릭스의 유명 다큐멘터리 시리즈 ‘셰프의 테이블(Chef’s Table)’ 시즌3에 출연하고 그해 같은 작품이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돼 레드카펫도 밟는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찰음식의 대가다. 전남 장성군에 있는 천진암은 정관 스님의 사찰음식을 배우려는 국내외 요리사와 맛보려는 방문객들로 연중 북적인다. 그는 뉴욕으로 떠나기 전인 지난달 26일 서울 강남구 봉은사에서 세계일보와 만나 “난 음식 전공자도 셰프(요리사)도 아닌 수행자”라며 “부처의 뜻을 전하고 사람들이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해 사찰음식을 하고 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어렸을 때 꿈은 뭐였고, 언제 불교를 접하게 됐나.
“경북 영주의 유교 집안에서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꿈은 딱히 없었고 돌아다니며 사람 만나는 걸 좋아했다. 길을 가다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이고 어디 사는지 물어서 알아냈다. 주변에서 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하루에 동네를 100바퀴 돌 만큼 돌아다닌다고 별명이 ‘영주 백바꾸(100바퀴)’였다.(웃음) 초등학교 3∼4학년 때 한문을 가르쳐주는 포교당에 다니면서 불교를 알게 됐다. 반야심경을 금방 외웠고, 불교 신자인 이모를 따라 절에 가는 것도 좋았다.”
―출가를 결심한 계기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너무 가슴이 미어졌는데 초등학생이던 동생 둘의 마음은 오죽할까 싶더라. 친구들한테 엄마가 없다는 소리도 못하는 어린 동생들 모습 보며 마음이 아팠다. ‘나도 시집가면 이런(부모와 자식이 죽음으로 이별하는) 굴레에서 못 벗어 나겠구나’란 생각에 아예 그런 인연을 두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그 당시를 떠올린 스님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그래서 어머니 49재를 앞두고 밤에 집을 나왔다. 아버지한테 출가하겠다고 했다간 막을 게 뻔하니.”
1974년 대구 동화사 양진암으로 간 그는 이듬해 사미니계를 받고, 6년 과정의 수원 봉녕사 강원(지금의 승가대학)을 졸업했다. 가족과는 1981년 해인사에서 비구니 구족계를 받고 정식 승려가 될 때까지 7년 동안 연락을 끊었다.
―사찰음식으로 수행하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강원을 졸업할 때 큰 스님이 ‘이제는 통불교가 아니라 쪼가리 불교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 말씀이 크게 와 닿았다. 조계종은 (승려가) 화두 붙들고 참선 수행을 해서 깨달음으로 가는 통불교를 추구하는데 그런 시대가 아니란 것이다. 대신 각자 강점을 살려 수행하면서 대중 포교에 힘써야 한다는 소리가 귀에 들어오더라. 그래서 내 자신을 보니 어려서부터 음식에 관심이 많았고 곧잘 했다. 중학생 시절 가지 하나로 다섯 종류 음식을 만든 적 있는데, 그 솜씨를 본 아버지가 ‘넌 지혜가 있어서 시집을 잘 가겠구나’ 했을 정도다. 출가했던 양진암 시절 자연스레 익힌 사찰음식을 통해 수행에 전념키로 했다.”
정관 스님은 이후 여러 사찰에서 수행하며 각 지역 음식문화를 익히고, 사찰음식을 깊고 폭넓게 탐구했다. 한국전통사찰음식연구회 활동을 하면서 2010년 ‘조계종 한국 사찰음식의 날’ 뉴욕 행사,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사찰음식 만찬 행사 등을 이끌었다. 사찰음식 교육관 ‘향적세계’에서 강의를 통한 전문 조리사 육성,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의 사찰음식 전문위원을 비롯해 금발우 선음식 아카데미 원장 업무도 맡았다. 2015년 미국의 세계적 요리사인 에릭 리퍼트가 진행하는 TV프로그램 ‘아벡 에릭’ 출연과 “고귀한 음식, 철학자의 음식”이라고 극찬한 ‘뉴욕타임스’ 보도에 이어 2017년 공개된 넷플릭스 ‘셰프의 테이블’ 시즌3 출연 등은 그의 명성에 날개를 달아줬다.
―당초 넷플릭스 출연을 거절했다가 수락한 이유는.
“에릭을 통해 출연 요청이 들어오니 에릭이 ‘그 스님은 순수한 수행자여서 세상에 내보내면 안 되고 철저히 보호해야 한다’며 거부했단다. 나도 셰프가 아니니까 같은 생각이었다. 그런데 넷플릭스가 ‘한국 음식 문화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소개하고 싶다’고 거듭 간곡하게 요청해 출연하기로 했다. 2016년 5월에 감독 등 스태프 10여명이 천진암으로 왔다. 촬영 시작 일주일 만에 못하겠다고 통보했다. ‘당신들 뜻대로 할 거면 안 한다. 당장 철수해라’고. 난리가 났다. 자기들끼리 회의한 후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더라.”
―그래서 어떻게 했나.
“너희가 나와 한국의 불교·정서·문화·자연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뭘 담겠다는 거냐.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오지 않으면 그만두겠다고 버텼다. 넷플릭스 측이 결국 수용해서 내가 주연은 물론 연출·대본·소품 등 거의 다 알아서 하고 그들은 찍기만 했다. 그렇게 한 달가량 함께 지냈는데 나중에는 나보고 (할리우드 섹시 스타 배우였던) ‘샤론 스톤’이란 별명까지 지어주더라.(웃음) 내가 ‘난 그렇게 섹시하지 않아’라고 했더니 ‘촬영에 어려움이 없도록 세심하게 신경 써줘 고마운 만능 엔터테이너 같다’는 의미로 그리 불렀단다. (정관 스님 다큐는 2017년 베를린영화제 ‘컬리너리 시네마’ 부문에 초청됐다.) 3주 가까이 극장에 걸렸는데 1960년대 독일로 파견된 광부·간호사나 그 자녀들이 보러 왔다가 많이 울었다. 돌아가시거나 고향에 있는 부모님과 형제자매가 그립고 예전에 집에서 함께 먹었던 음식이 생각나는 등 원초적 정서가 되살아 난 거다.”
―해외에 자주 나가는 것 같은데, 사찰음식 등 한식 홍보에 좀더 신경 쓰는 부분이 있다면.
“한국문화원이나 명상 단체, (에릭 등) 친분이 깊은 셰프 등의 요청으로 해마다 10여 차례 나간다. 우리 김치 문화는 201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지정으로 알려지고 나도 많이 보급했기에 2년 전부터는 장 문화를 적극 알리고 있다. 간장과 된장은 맛을 내는 양념 역할뿐 아니라 몸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 그런 설명을 해주면서 장 담그는 법과 요리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알려준다. 그래서 출국할 때마다 메주 10여 덩이와 소금을 챙겨 간다. 현지인들이 장맛도 직접 볼 수 있게 천진암에서 담가 둔 7년 된 간장과 된장 10∼20㎏을 갖고 나가 100g씩 선물한다. 지난해 개발해 헝가리에서 처음 선보인 ‘음식 명상’도 소개하고 있다. 참가자들이 음식을 집으며 식재료가 어디서 왔는지, 먹는 즐거움은 어떻게 해소할지 등 내면과 소통하고, 식사 후 빈 그릇을 들고 맨발로 걸으며 자기를 관찰하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한국 전통 사찰음식의 매력은 뭔가.
“인도, 중국, 일본, 티베트 등 불교가 전파된 다른 나라 사찰 음식은 우리처럼 다양하게 발달하지 않았다. 우리 사찰음식은 자연 그대로의 식재료 맛을 최대한 살리면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한다. 계절에 따라 성질이 달라지는 식재료를 알아가는 건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과 같다. 사찰음식을 준비하는 과정 자체가 깨달음을 얻는 수행인 셈이다.”
―이 매력을 알리는 홍보대사 역할에 어려움이 있다면.
“음식 재료값부터 보조 인력 인건비, 사찰 운영비 등을 전부 혼자 감당하고 있다. 1인당 사찰음식 체험 비용 8만원 받는 것으론 어림없어서 마이너스 통장을 쓸 수밖에 없다. 조계종에서 ‘사찰음식 명장’이라고만 할 게 아니라 사무·음식 보조 인원 2명 인건비(약 500만원)라도 지원해주면 좋겠다. 그러면 몸이 으스러질 때까지 사찰음식 수행과 포교를 할 수 있을 텐데….”
―가정과 직장에서 ‘혼밥’ 문화가 만연한 한국 사회의 식생활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밥상머리 교육도 사라지는 등 한국의 정신, 얼이 무너져 가는 게 제일 안타깝다. 식사 자리는 교류하고 소통하면서 믿음을 쌓아가는 기회인데, 가정과 직장에서 그런 게 급격히 줄었다. 혼자 밥 먹는 거에 익숙해지면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을 만큼 혼밥은 스스로를 옭아맨다. 꼭 사찰음식이 아니어도 좋으니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가족끼리 따뜻한 밥상을 같이 하고, 밖에서도 가급적 혼밥은 피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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