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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즐겨듣는 팟캐스트엔 로고송이 있다. 두 명의 진행자가 우쿨렐레와 리코더를 직접 연주해 만든 것인데 나는 늘 이 부분을 건너뛰고 듣는다. 리코더 소리를 들으면 마음속에 가파르게 쌓여있던 블록 같은 것들이 단숨에 무너져내리기 때문이다.

나는 리코더를 소리가 아닌 다른 것으로 기억한다. 리코더 머리 부분을 감아쥔 손, 그것을 치켜들었다가 힘껏 내리칠 때 사방으로 튀던 침, 정수리를 달구는 뜨거운 열기와 텅 빈 운동장,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우는 납작한 얼굴의 고. 그것은 열한 살 초여름의 기억이다. 당시 나는 반에서 리코더를 가장 잘 부는 아이였다. 담임은 시범 연주가 필요할 때 꼭 나를 불러냈다. 교실에 아직 풍금이 놓여 있던 시절, 리코더와 단소처럼 가볍고 저렴한 플라스틱 악기들을 주로 다루던 시절이었다.

고는 체구가 작고 행동이 굼떴다. 손가락이 유난히 짧아서인지 리코더 운지법도 제대로 외우지 못한 상태였다. 합주를 할 때 기이한 소리가 들린다 싶으면 범인은 틀림없이 고였다. 담임은 고를 불러내 교실 앞에 세웠다. “쟤처럼 불어 봐.” 담임이 턱 끝으로 나를 가리켰다. 고가 좀처럼 음을 짚지 못하자 담임은 잔뜩 화를 내며 내게 말했다. “다음 시간까지 고가 너랑 똑같이 불 수 있게 만들어 와. 손바닥을 때려서라도 똑바로 가르치라고.”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얘가 못 불면 네 실기 점수도 빵점인 줄 알아.”

다음 음악 시간은 사흘 뒤였고, 나는 고와 함께 매일 교실에 남아 리코더를 연습했다. 고가 리코더에 숨을 불어넣을 때마다 훼훼, 하고 텅 빈 소리가 울렸다. 나는 친구들과 놀지도, 집에 가지도 못한 채 고의 손가락만 노려보고 있어야 했다. 불쑥 억울한 마음이 일었다. “이걸 대체 왜 못해? 너는 바보야?” 교실 문이 잠긴 뒤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리코더를 가르치다 말고 나는 소리를 질렀다. “이번에도 틀리면 손바닥을 때릴 거야.” 담임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고 앞에 우뚝 섰다. 얼굴을 고에게 바짝 들이밀어 위협한 뒤 팔짱을 끼고 턱을 쳐들었다. 고의 리코더에 고여 있던 묽은 침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고는 에델바이스를 단 한 소절도 불지 못했다.

나는 고에게서 리코더를 빼앗았다. 고의 양 손바닥을 펴 앞으로 내밀게 한 뒤 망설임 없이 리코더로 내리쳤다. 땀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린 순간, 고와 나는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손을 뒤로 숨긴 고가 입을 크게 벌리고 울기 시작했다. 나는 음악 교과서와 리코더를 가방 안에 마구 쑤셔 넣은 뒤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리코더를 내리칠 때의 감각이 손안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순식간에 새빨개지던 고의 손바닥이 떠올라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집까지 뛰어갔다. 매미 소리 같은 것이 끈질기게 내 뒤를 쫓았다.

내 실기 점수가 어땠는지 같은 건 기억에 없다. 이후 리코더를 불 때마다 나는 고를 떠올렸다. 어떻게든 악보를 외워보려 애쓰던 고, 두려워하면서도 순순히 내게 손바닥을 내밀던 고. 그러면 반드시 떠오르고 마는 것이다. 찰나의 우월감에 취해 함부로 리코더를 휘두르던 나의 저열함이 말이다.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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