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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기의시대정신] 2011년 나는 가수다, 2024년 흑백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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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10-21 23:22:40 수정 : 2024-10-21 23: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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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전 ‘계급전쟁’엔 공정 상실
예능 진화하며 실력만으로 승부
셰프들 열정·품격에 시청자 열광
사회는 계급천장 견고해져 씁쓸

“겨뤄볼 기회가 생긴 거잖아요.” 넷플릭스 화제작 ‘흑백요리사’ 1화에서 터져 나온 말이다. 영리한 기획이었다. 백수저, 흑수저라고 비틀어 칭했지만 금수저, 흙수저로 상징되는 서열과 다르지 않았다. 부제를 대놓고 계급 전쟁이라 붙였다. 20명의 백수저 셰프들은 한층 높은 무대에 서서 팔짱을 낀 채 80명의 흑수저 셰프들을 내려다봤다. 그들과 겨뤄볼 기회를 잡기 위해 80명에서 무려 60명이 방출되는 동안 의기양양 부전승을 손에 쥔 채. 프로그램은 노골적으로 백수저, 즉 기득권 세력과 흑수저, 즉 신진 세력 간의 대결을 예능화했다. “역시 관록” “밟아버려야겠다”란 탄성과 결의가 교차했다.

시작은 매우 불공평해 보였다. 언더도그 서사를 극대화할 장치들이 곳곳에 깔렸다.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앞세운 백수저와 달리 흑수저는 이름도 없이 닉네임으로만 불렸다. 그러나 백수저와 흑수저의 숫자가 같아지자 분위기는 급반전됐다. 미슐랭 셰프와 무명의 요리사가 계급장 떼고 맨몸으로 붙었다. 두 눈을 가린 심사위원 앞에서 단 한 숟가락에 담긴 맛 하나로. 창을 든 흑수저보다 방패를 든 백수저가 더 초조해 보였다. 명장, 그랜드마스터, 스타 셰프, 대회 우승자 타이틀 후광이 무명의 패기 앞에 우수수 무너졌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전 KBS PD

‘흑백요리사’ 붐이 뜨겁다. 셰프들의 캐릭터, 대사 하나하나가 온라인 ‘밈’으로 재생산되는 등 종방 후에도 인기가 여전하다. 참가자들이 운영하는 식당 예약에 수십만 명이 몰리며 예약 앱이 먹통이 되고, 편의점 간편식으로 재탄생한 이들의 요리는 뜨는 순간 완판이다. 넷플릭스 비영어권 3주 연속 1위를 달성하며 해외에서도 화제가 됐다. 미국 블룸버그통신과 CNN,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등 해외언론도 관련 기사를 내며 주목하고 있다.

‘흑백요리사’는 앞서 글로벌 흥행을 이끌었던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에서 큰 틀을 가져왔다. 인간을 압도하는 거대한 세트장과 치열한 생존경쟁, 기호로 불리는 참가자와 냉정한 성우의 음성, 그리고 상위 계급이 하위 계급의 벼랑 끝 싸움을 내려다본다는 구조가 그렇다. 그러고 보니 영화 한류를 이끈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와 ‘기생충’도 수평과 수직 이미지로 구조화된 계급 전쟁이다. 다만 ‘흑백요리사’에는 이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있다. 바로 질주하는 계급 전쟁 아래 깔려 있는 ‘공정’이라는 이름의 궤도다. 이로써 계급 전쟁은 계급 화합으로 방향을 튼다.

한 분야의 정점을 찍은 이들이 계급장 떼고 맞붙는다는 예능 콘셉트는 2011년 MBC ‘나는 가수다’에서 출발했다. 정상급 가수들이 대결에 나서고 평가를 받는다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됐다. 그러나 첫 회부터 삐걱거렸다. 참가자 중 가장 연장자이자 가장 ‘급이 높은’ 김건모가 탈락하는 ‘이변’이 발생한 것이다. 출연자들은 반발했고 이에 연출자까지 흔들리며 재도전이라는 무리수를 뒀다. 탈락자를 대체하기 위해 대기하던, 당시만 해도 상대적으로 ‘급이 낮았던’ 김연우는 안중에도 없었다. 다음 회, 후배 정엽이 탈락하자 그제야 모두가 수긍했다. 가장 공정해야 할 경연에서 관객이 매긴 점수는 무시한 채 떨어져서는 안 될 사람, 떨어져도 될 사람을 제멋대로 규정하는 폭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13년 전 일이다.

그사이 예능은 진화했다. 미국, 독일, 호주 등 40여개국에 포맷을 수출하며 성공을 거둔 MBC ‘복면가왕’은 가면을 쓰고 오직 실력만으로 평가받는다는 콘셉트로 호평받았다. 걸그룹 멤버인 EXID의 하니가 ‘쉬즈 곤(She’s Gone)’을 부른 세계적인 록그룹 스틸하트의 보컬리스트를 눌렀다는 사실이 대반전, 역대급 충격이라며 보도된 게 2016년이다.

2024년 ‘흑백요리사’는 훨씬 쿨하다. 뒷골목 식당 주인이 미슐랭 스타 셰프를 이겨도 ‘수고하셨습니다’ ‘축하합니다’로 끝낸다. 핵심 수훈자는 기득권을 내려놓고 경연에 나선 백수저 요리사들이다. 이겨야 본전, 지면 망신일 수도 있는 자리에 기꺼이 나와 까마득한 후배 혹은 무명 요리사들에게 ‘겨뤄볼 기회’를 내줬다. 20~30대 주 시청자들은 흑수저의 도전과 열정을 응원했고 백수저의 연륜과 품격에 마땅한 존경을 보냈다. 프로그램을 따라다니는 키워드 중 하나가 ‘진정한 어른’이다.

‘흑백요리사’ 신드롬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공정한 경쟁’ ‘진정한 어른’에 목말랐다는 반증이다. 예능이 진화하는 13년 동안 우리 사회는 어땠는가. 빈부, 나이, 학력 상관없이 머리와 끈기로 맞붙었던 사법시험은 폐지되고, 수천만 원 학비의 로스쿨 문턱이 당연하게 자리 잡았다. 고졸 출신 법조인이 대통령이 되고 중졸 출신이 헌법재판관이 되던 시대는 끝났다. 대학 입시 성공의 조건은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 할아버지의 재력’이라며 노력의 자리를 부와 전략이 밀어내고 있다. 여기에 ‘아빠의 권력’도 추가되는 모양새다. 개천의 용, 희망의 사다리, 공정, 정의, 상식 운운하는 정치인들은 좀처럼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을 기미가 안 보인다. 창작물은 사회를 반영한다. 여성들이 유리 천장(glass ceiling)을 깨부수는 사이 계급 천장(class ceiling)은 점점 더 견고해지고 있다. 이제는 우리 사회가 이 웰메이드 예능이 던진 화두에 답해야 할 차례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전 K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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