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양행 창업자이자 독립운동가 유일한 박사의 일대기 조명한 ‘스윙 데이즈_암호명 A’ 초연
#마가레타 거투르트 젤르(1876∼1917). 자바계 혼혈인 어머니를 둔 네덜란드 출신의 그는 이국적 외모와 인도네시아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동양적 매력을 뽐낸 무희였다. 특히 도발적인 밸리 댄스는 프랑스 등 유럽 전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유럽 사교계 및 정부 고위 인사 등과의 염문설도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당시 스파이(첩자) 의심을 받다 연합군 측 고급 정보를 독일 측에 팔아넘겼다는 반역죄 혐의로 총살형을 당했다. 본명보다 가명 ‘마타하리’로 유명하다.
#유일한(1895∼1971).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 1926년 조선 최초 제약회사 ‘유한양행’을 설립한 그는 한국 제약산업 발전과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에 크게 기여했다. 잘나가는 사업가였지만 50세 때 가족의 안녕과 회사의 존망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일제 강점기 때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 전략첩보국(OSS)이 주도한 비밀 첩보작전 ‘냅코(NAPKO) 프로젝트’에 참여해 일본의 군사정보 수집과 독립운동 자금 지원 등을 주도한 것. ‘암호명 A’로 활동했던 사실이 사후 뒤늦게 알려졌다.
1·2차 세계대전 당시 스파이 활동을 한 마타하리(‘첩자 누명을 쓴 희생양’이란 평가도 있음)와 독립운동가 유일한 박사의 실화를 소재로 한 창작뮤지컬 ‘마타하리’, ‘스윙 데이즈_암호명 A’가 무대에 올라 관심을 끈다.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았던 인물들인 만큼 두 작품의 이야기와 색깔이 아주 달라 비교해 볼 만하다.
◆마타하리
지난 5일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시그니처홀에서 개막한 ‘마타하리’는 2016년 초연 후 네 번째 시즌을 맞이하면서 완성도가 더욱 견고해졌다. 가난과 고통이 깊었던 마가레타에서 고혹적이고 관능적인 춤으로 스타가 된 마타하리, 그녀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는 프랑스 공군 조종사 아르망, 마타하리에 집착하면서 스파이로 활용한 프랑스 정보국 라두 대령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여기에 한국 관객들에게 유독 사랑받는 미국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66)의 음악은 각 인물의 다채로운 감정에 맞춤식으로 덧입혀지며 관객 몰입도를 높인다.
마타하리의 관능적인 춤을 비롯해 당시 파리 모습을 정교하게 재현한 무대와 200벌이 넘는 의상 등 볼거리도 많다. 특히 마타하리가 고혹적인 밸리 댄스로 사교계에 데뷔하는 ‘사원의 춤’ 장면은 백미로 꼽힌다. 초연부터 마타하리 역으로 출연 중인 옥주현(44)은 개막 다음날 기자들과 만나 “(마타하리는) 저와 닿아 있는 부분이 많아 (배우로서) 물음표가 제일 적은 작품이 ‘마타하리’였다”며 “(2022년 공연에 이어) 다시 마타하리를 연기하기까지 너무 기다렸다. 오랜 롱디(장거리 연애)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곧 만나는 마음으로 임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함께한 와일드혼이 “‘마타하리’는 옥주현을 위해 만든 작품”이라고 공언한 게 빈말이 아님을 입증한다. 노래와 연기, 춤 모두 쉽지 않은 역할인데 3박자가 잘 맞는다.
그 덕에 굴곡진 삶 속에서 다양한 감정을 오가는 마타하리의 모습이 설득력 있게 비쳐진다. 1세대 걸그룹 ‘핑클’ 출신으로 2005년 뮤지컬 데뷔 후 최정상급 스타 배우가 된 옥주현은 “작품 선택이 내 출발이다. 관객에게 ‘저 사람(배우)이 선택했다면 이유가 있을 거다. 고민하지 않고 지갑 열어도 된다’는 마음을 주고 싶다”며 “작품을 선택하고 나면 의심 없이 영혼을 갈아 (참여)한다”고 했다. 와일드혼은 “옥주현의 노래를 들은 2015년 그의 파워(힘)와 우아함, 능력에 영감을 받아 EMK뮤지컬컴퍼니와 ‘마타하리’를 만들기로 했다”며 “옥주현은 음악의 ‘베스트 프렌드(가장 친한 친구)’다”라고 치켜세웠다. 여성 4인조 그룹 ‘마마무’의 솔라가 옥주현과 번갈아 마타하리를 연기한다. 공연은 내년 3월 2일까지.
◆스윙 데이즈_암호명 A
유한양행 창업자이자 많은 존경을 받는 기업인으로 잘 알려진 유일한 박사가 스파이 활동도 마다 않은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뮤지컬화한 작품이다. 3년에 걸쳐 100억원 넘는 제작비가 투입됐다. 국내 최초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실미도’ 등 시나리오 작가로 유명한 김희재(55)가 이야기를 썼다. 그는 지난달 26일 기자간담회에서 “유일한 박사의 일대기가 오래도록 회자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영화가 아닌 뮤지컬 장르를 택했다”며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희생하고 선택할 것인지에 관해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유 박사는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5년 미국 전략첩보국이 한국인 19명으로 꾸려 일본에 대한 첩보전을 준비한 ‘냅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들 요원은 모두 암호명 A, B, C 등 알파벳으로 불렸고, 유 박사 암호명이 A였다. 작전 실행을 코앞에 두고 일제가 항복하면서 무산된 이 프로젝트는 유 박사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흐른 뒤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뮤지컬은 유 박사가 모델인 주인공 유일형이 여성 독립운동가(베로니카)의 죽음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뒤 일본 총독 곤도, 소꿉친구이자 곤도의 아들인 일본군 중좌 야스오에 맞서는 내용이 줄기다. 유일형이 오가는 중국과 조선, 미국의 당시 풍경을 담아낸 무대와 일제의 극단적인 ‘카미카제 작전’(자살 특공대 전술)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영상, 신나게 무대를 꽉 채우는 스윙 댄스 등 인상적인 장면도 많다. 다만 초연이라 그런지 극 중 긴박한 상황이 그대로 전해지지 않거나 죽은 후 환영으로 계속 등장하는 베로니카가 겉도는 듯한 모습 등 작품 전체의 밀도가 낮게 느껴지기도 한다.
음악은 미국 브로드웨이 스타 작곡가 제이슨 하울랜드가 맡았다. 신성록, 민우혁과 번갈아 유일형을 연기하는 유준상은 “‘스윙데이즈’가 대한민국 창작 뮤지컬계의 새로운 패러다임(구도)을 제시하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고 말했다. 공연은 중구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내년 2월 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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