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재 대신 철망 발코니 세운 디올
파리 ‘디올 하우스’ 오스만 양식 적용
설치작품처럼 철거 쉬워 사계절 변신
콘크리트 구조만 살린 탬버린즈
지상에 구조체·관리동 최소화시켜
지하매장 천장 유리로… 웅장함 표현
영상과 음악, 심지어 말도 짧아지는 ‘쇼트폼(shortform)’의 시대다. 길이가 짧아지니 화려한 효과, 강렬한 후렴, 낯선 줄임말 등 자극은 세졌다. ‘쇼트폼’은 한 번 만들면 쉽게 바꾸기 어려운 건축 공간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 임시로 운영되는 ‘팝업(pop-up) 공간’이 이런 경향을 반영한다.
몇몇 논문에 따르면 팝업 공간은 2002년 미국 대형 할인점 ‘타깃(Target)’이 뉴욕 맨해튼에 신규 매장을 열 적절한 장소를 찾지 못해 임시로 운영했던 매장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초기에는 새로운 제품을 출시하기 전 소비자의 반응을 살피거나 재고 처리를 위한 임시 매장 형태였는데, 최근에는 브랜드나 서비스를 홍보하거나 고객과의 접점을 늘리는 등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팝업 공간의 범주도 매장에서 전시, 레스토랑으로 확대됐다.

대한민국 ‘팝업의 성지’는 단연 서울 성수동이다. 매주 평균 50개 정도의 팝업 매장이 생겨난다. 성수동에도 임대료와 땅값이 치솟으면서 기존 상인들이 쫓겨나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만 신사동 가로수길처럼 상권이 침체되고 활력을 잃어가는 ‘고임대 화석화(High-rent blight)’ 현상은 심하지 않다. 이는 팝업 공간이 여전히 성수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팝업 공간으로 쓰이는 건물이 건축적으로 특별할 필요는 없다. 천장이 높고 넓은 공간에 가급적 단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면 팝업 공간으로 사용하기에 적당하다. 성수동은 과거 공장이 많았던 지역이라 자동차정비소, 인쇄소, 창고, 경량 철골조 건물이 많다. 이는 다른 지역과 비교했을 때 성수동만이 갖는 차별점이다. 많은 팝업 공간이 성수동에 생기고 사라지다 보니 이제 서울에서 유행을 가장 빨리 확인할 수 있고 그래서 가장 힙(Hip)한 동네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팝업 매장이 단기간에 이목을 끌고 고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는 장점은 있지만, 장기적으로 브랜드를 구축하고 고객과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는 팝업 매장의 실험성과 가변성, 화제성은 취하면서 동시에 브랜드가 지닌 명확한 메시지와 정체성은 유지하는 매장 형태가 성수동에 생겨나고 있다. 성수동에서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연무장길의 서쪽 끝에 살짝 비껴난 채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디올(Dior) 성수와 탬버린즈(Tamburins) 성수가 바로 이런 형태의 매장이다.
두 건물 중 먼저 준공된 건물은 디올 성수다. 택시 회사가 있던 자리에 3년 전 들어선 디올 성수는 브랜드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는 파리 몽테뉴가 30번지에 있는 ‘디올 하우스’를 모델로 삼았다. 디올 하우스는 1946년 크리스티안 디오르(크리스챤 디올)가 자신의 패션 매장을 처음 설립한 곳이다. 건축적으로는 19세기 중반 나폴레옹 3세의 지시로 당시 파리 시장이었던 외젠 오스만이 파리를 대개조할 때 신축 건물에 적용한 ‘오스만 양식’을 띠고 있다.
오스만 양식은 건물 높이가 비슷하고 규격화된 창문과 철제 발코니가 반복돼 있다. 지붕 아래에 하인들이 거주하는 다락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두 개의 경사로 이루어진 만사드 지붕도 특징이다. 재료는 웅장한 외관과 튼튼한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석재를 사용했다.
한국에서 주로 활동하는 프랑스 건축가 피에르 잘리콩은 석재가 아닌 철망을 사용해 디올 성수를 설계했다. 오스만 양식의 철망은 실제 건물이 아니라 안쪽에 있는 매장을 감싸는 일종의 설치 작품이기 때문이다.
디올 성수에서 확인할 수 있는 브랜드의 또 다른 유산은 건물 입구 위에 설치돼 있는 별 조형물이다. 별은 디오르가 자신의 매장을 열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일화에 등장한다. 당시 41세였던 디오르는 면직물 사업으로 성공한 마르셀 부삭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는다. 깊은 고민에 빠진 디오르는 길을 걷다 별 장식물에 걸려 넘어질 뻔했는데, 이를 부삭의 제안을 거절하라는 신의 계시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디올 성수의 정식 명칭은 ‘디올 성수 콘셉트 스토어’다. 홈페이지에 따르면 디올 성수는 계절별로 달라지는 컬렉션의 콘셉트를 보여주는 공간인데 ‘한시적’으로 운영된다고 한다. 건물도 석재가 아닌 철망으로 만들어져 상황에 따라 쉽게 철거할 수 있다. ‘한시적’, ‘쉬운 철거’는 모두 팝업 공간이 지니는 특징이다.
디올 성수가 파리의 전형적인 건축으로 브랜드의 정체성을 보여준다면 맞은편에 있는 탬버린즈 성수는 예전 공장의 콘크리트 구조만 살려 “규정되지 않은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향수”라는 브랜드의 지향점을 전달한다. 설계를 맡은 더시스템랩 대표 김찬중은 지상에 최소한의 구조체와 관리동만 남긴 채 매장을 포함한 대부분을 지하에 배치했다. 자신의 개념을 ‘미완성된 비움’으로 설명하는 김찬중은 건물에서 입면을 없앴다. 그런데 입면은 상업 공간에서 상품을 광고할 때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부분이다. 이런 건축가의 의도는 차치하더라도 평당 임대료가 20만원이 넘는 성수동에서 대지에 허용된 480%의 용적률을 포기한다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다.
지하에 있는 매장에 들어서면 유리로 된 천장을 통해 그 위에 남겨진 콘크리트 구조물을 올려다볼 수 있다. 디올 성수와는 또 다른 웅장함이 느껴진다. 더불어 예전 공장 노동자는 자신들이 쓰던 건물이 이런 장면을 보여줄 수 있을 거란 상상을 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남겨진 콘크리트 골조는 신제품과 어울리는 설치 작품의 무대가 되기도 한다. 2023년 11월 준공할 때만 해도 탬버린즈 성수는 “생경한 형태의 정원”이라는 주제로 꾸며져 있었다. 하지만 올 초에는 새롭게 출시한 향수에 맞는 장미 가시와 넝쿨이 매장 안과 콘크리트 골조에 설치돼 있었다.
디올 성수와 탬버린즈 성수는 모두 상설 매장이다. 하지만 새로운 제품이 출시되거나 특별한 행사를 할 때마다 매번 다른 경험을 제공하고 엄청난 주목을 끈다는 점에서 팝업 공간이 갖는 특성도 지니고 있다. 두 매장은 각 브랜드의 정체성을 꾸준히 보여주면서도 성수동 특유의 고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는 활동적인 느낌(Vibe)을 전달한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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