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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미국 연방대법관의 별세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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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6-07 11:42:00 수정 : 2025-06-07 11:4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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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창립 이래 24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데이비드 수터만큼 독특한 대법관도 없을 것이다. 그는 미국 북동부의 춥고 한적한 지역인 뉴햄프셔주(州)에서 태어났다. 명문 하버드대 로스쿨를 졸업한 뒤 대도시 로펌에 입사하거나 중앙 정치 무대 등으로 진출하는 대신 고향에서 수십년간 공직자로 소탈한 삶을 살았다.

 

수터가 뉴햄프셔를 벗어난 것은 51세이던 1990년 조지 W H 부시(아버지 부시) 대통령에 의해 연방대법관으로 발탁됐기 때문이다. 최고 법원 구성원이 되었다는 영예도 잠시, 수터는 곧 고향을 그리워하며 향수병에 시달린다. 수도 워싱턴에서의 삶은 독서와 등산을 즐기는 그와는 잘 맞지 않았다.

1990년부터 2009년까지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을 지낸 데이비드 수터(1939∼2025). AP연합뉴스

대법관 시절 수터는 거의 매일 집무실에서 요구르트와 사과로 혼자 점심을 해결했다. 독신주의자인 그는 사교 생활을 하지 않았다. 퇴근 후에 시간이 나면 달리기를 즐겼다. 미국 대법원은 매년 10월 개정해 이듬해 여름까지 변론기일을 열거나 심리가 끝난 사건을 선고한 뒤 휴정기에 돌입한다. 그 기간이 되면 수터는 뉴햄프셔로 돌아가 그동안 하지 못한 독서와 등산으로 소일했다. 19년간 대법관으로 일한 수터는 2009년 결국 대법원을 떠나는 길을 택했다. 미국에서 연방법관은 종신직이고 당시 그의 나이 70세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조기 은퇴라고 하겠다. 낙향한 수터는 책 속에 파묻혀 지내면서 은둔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공화당 행정부 시절 대법관에 임명된 점에서 보듯 수터는 보수적 법률가로 알려졌다. 하지만 막상 대법관이 된 뒤 그는 좌우를 넘나들며 중도 노선을 걸었다. 자연히 보수 이념에 어긋나는 판결도 여럿 내려 공화당의 반발을 샀다. 수터는 정치권과 입법부의 사법부 개입 시도를 경계했다. 마찬가지로 법원이 정치에 관여해서도 안 된다고 봤다.

 

그가 대법관을 그만두기로 작정한 것은 2000년 미 대선을 둘러싼 이른바 ‘플로리다 재개표’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한다. 민주당 앨 고어 후보 측이 재개표를 강력히 촉구하는 가운데 보수 성향 대법관이 다수인 대법원은 공화당 주장을 받아들여 재개표 중단을 선언했다. 이로써 공화당 조지 W 부시(아들 부시) 대통령 당선이 확정됐다. 당시 재개표를 해야 한다는 소수의견을 낸 수터는 이를 ‘사실상 대법원이 선거 결과를 결정한 것’으로 여겨 크게 실망했다.

1990년 7월 조지 W H 부시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백악관 브리핑룸에서 그가 막 연방대법관 후보자로 지명한 데이비드 수터 판사를 백악관 취재진에게 소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수터가 지난 5월8일 뉴햄프셔의 자택에서 85세를 일기로 별세한 뒤 고인의 청빈하고 강직했던 삶을 추모하는 이가 많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도 권력자의 마음에 안 드는 판결이 나오면 법원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사례가 잦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직전의 조 바이든 대통령도 비슷했다. 보수 우위 구도의 대법원에서 진보 이념과 상충하는 판결이 잇따르자 바이든 행정부는 9명으로 고정된 대법관 정원을 대폭 늘리거나 대법관 종신제를 폐지하고 임기제를 도입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나섰다. 그러자 당장 ‘민주당 입맛에 맞는 법률가를 대법원에 밀어넣어 사법부를 장악하려는 시도’라는 비판이 쏟아졌고, 결국 바이든 행정부는 대법원 개편 구상을 포기해야 했다. 요즘 한국도 대법관 증원이 정치적 화두로 떠오른 가운데 조희대 대법원장이 ‘신중한 접근’을 당부하고 나섰다. 사법제도 개혁은 국가 백년대계가 걸린 중대한 사안인 만큼 사법부 수장의 고언(苦言)을 경청할 필요가 있겠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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