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정책은 유화 기조로 일관
북핵 진전 없는 남북 개선 무망
안보논리 앞세운 리더십 보여야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극적인 외교 리더십 변화를 보인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정권 초 자주파와 동맹파 갈등으로 윤영관 외교부장관을 경질했던 정부가 지지층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고 이라크 파병,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추진했다. 윤 전 장관은 이를 ‘러닝 프로세스’(Learning process), 학습 효과로 표현한 적이 있다. 국가 지도자 누구나 현실 외교를 경험하면서 정책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실제 노 전 대통령은 집권 4년 차인 2006년 12월 민주평통자문회의 상임위원회 연설에서 “개인 노무현과 미국 관계가 아니라 대한민국과 미국의 우호관계, 동맹관계가 지속적으로 작동하느냐의 바로미터가 이라크 파병이었다”고 했다.
미국을 방문 중인 이재명 대통령 외교 행보는 일단 긍정적이다. 일본을 먼저 찾아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와 미래 협력을 강화하는 내용의 공동발표문을 내놓은 데 대해 첫 단추를 잘 끼웠다는 평이다. 과거사나 후쿠시마 오염 처리수 방류 논란에 반일 성향 언사를 쏟아냈던 ‘정치인 이재명’과 결이 달랐다. 위안부 합의 파기와 일본 정부의 대한(對韓) 수출통제 등 악화일로로 치달았던 문재인정부와는 다른 출발이다.

이 대통령이 표방한 ‘국익 중심 실용외교’의 일환으로 보인다. 트럼프발(發) 관세 폭풍, 약육강식의 정글로 변한 강대국 정치 질서에서 국익을 지키려면 확실한 우군부터 챙기는 게 순리다. 현실 외교보다 이념을 앞세웠던 전임 진보 정부의 시행착오를 피하려는 학습 효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북 정책만큼은 역대 진보 정부의 ‘이어달리기’를 보는 느낌이다. 이재명정부는 대북 전단 살포를 막고 50년간 송출한 북한 주민용 대북 방송을 끊었다. 북측 위반으로 무력화된 9·19 군사합의도 선제적, 단계적으로 복원하겠다고 했다. 이런 유화적 조치를 “허망한 개꿈”으로 폄하한 김여정 발언은 애써 외면했다.
이종석,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을 각각 국정원장, 통일부 장관에 앉힌 인선은 ‘문재인 시즌2’를 연상케 한다. 문정부가 정권 초부터 “진도를 빼야 한다”고 속도전을 폈듯이 빠른 시일 내 남북관계를 풀겠다는 초조감으로 읽힌다. “우리 임기 내 남북평화가 거의 불가역적인 단계까지 가도록 해야겠다고 목표했다”는 문재인의 의지와 ‘이단아’ 트럼프의 등장으로 초유의 북·미 정상회담,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지만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북한의 핵·미사일 기술 고도화와 우크라이나 참전을 통한 북·러 밀착으로 한반도 상황은 더 나빠졌다.
북핵 해법을 찾지 못하는 한 남북관계 개선은 무망하다. 이 대통령은 미·일 순방에 앞서 핵·미사일 동결-축소-비핵화로 이어지는 3단계 북핵 해법을 언급했다. 문정부가 내놓은 ‘핵 동결 입구론’과 유사하다. 북한이 종국적으로 핵을 폐기하는 협상 테이블에 앉을지 의문이지만, 앉더라도 몇년 전보다 훨씬 큰 판돈을 요구할 것이다. 이벤트를 좋아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동결’의 과실만 따 먹고 한·미 연합훈련·주한미군 축소, 전시작전권 전환 같은 안보 부담은 우리가 떠안게 될까 봐 벌써부터 걱정이다.
김정은은 트럼프나 푸틴을 통해 ‘사실상의 핵보유국’을 인정받는 ‘후견국의 정치적 승인 경로’를 밟을 공산이 크다. 트럼프와 남한 진보 정부 재등장을 핵보유국 빌드업을 하는 시·공간으로 활용할 것이다. 북한은 3대에 걸쳐 핵개발에 매달리면서 협상 카드로 실속을 챙겨 체제 위기를 넘겨왔다. ‘우리끼리’ 외교,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로는 북핵 시계를 한순간도 멈춰 세우지 못했다. 역대 진보 정부가 남긴 학습 효과다. 발등에 떨어진 통상 대란을 수습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북핵 이슈는 대한민국의 미래, 생존이 달린 문제다. ‘핵 있는 북한’을 상대할 때 이 대통령의 국익 중심 외교·안보 리더십이 가장 잘 발휘돼야 한다. 이미 김정은은 남북이 동족 관계가 아니라 적대적 두 국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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