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발이 아버지’ ‘야동·직진 순재’ 등
다양한 모습으로 국민들 사랑받아
14대 국회의원 당선… 후학도 양성
“같은 할아버지라도 차별화된 모습”
다양한 연기 시도로 동료들에 귀감
평생을 무대 위에서 살아온 ‘영원한 현역 배우’ 이순재, 그 91년의 무대가 조용히 막을 내렸다.
25일 유족에 따르면 이순재는 이날 새벽 향년 9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고인은 4살 때 조부모를 따라 서울로 내려왔다. 초등학생 때 해방을 맞았고, 고등학교 1학년 때 한국전쟁을 경험했다.
이순재가 연기에 눈을 뜬 건 대학생 때다.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한 고인은 당시 대학생들의 값싼 취미인 영화 보기에 빠졌고, 영국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가 출연한 영화 ‘햄릿’을 보고 배우의 길을 걷게 됐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한 뒤 1965년 TBC 1기 전속 배우가 됐다. 그가 걸어온 길은 국내 방송드라마의 시작이자 역사였다. 이순재는 KBS 첫 드라마인 ‘나도 인간이 되련다’(1962)를 비롯해 ‘동의보감’(1991), ‘보고 또 보고’(1998), ‘삼김시대’(1998), ‘목욕탕집 남자들’(1995), ‘야인시대’(2002), ‘토지’(2004), ‘엄마가 뿔났다’(2008) 등 140편에 출연했다. 단역으로 출연한 작품까지 포함하면 셀 수 없을 정도다. 한 달에 30편 넘는 작품에 출연한 적도 있어, 그야말로 ‘TV만 틀면 이순재’였다.
시청률 65%를 기록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1991∼1992)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표상이었던 캐릭터 ‘대발이 아버지’를 연기한 그는 당대 아버지의 모습을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정감 있게 표현해 공감을 끌어냈다.
고인은 자신의 연기 스펙트럼을 끊임없이 넓혀갔다. 1970∼80년대 ‘사모곡’, ‘인목대비’, ‘상노’, ‘풍운’, ‘독립문’ 등 사극에 꾸준히 출연한 그는 이후 ‘허준’(1999), ‘상도’(2001), ‘이산’(2007) 등에서 카리스마 넘치고 묵직한 연기를 선보였다.
70대 들어서는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2006), ‘지붕 뚫고 하이킥’(2009)에서 코믹 연기도 선보였다. 근엄한 이미지 대신 허당미 있는 할아버지 모습에 세대를 뛰어넘어 어린이 팬들까지 생겨났다. 이때 만들어진 ‘야동 순재’는 아직까지 ‘밈(meme)’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2013년에는 ‘꽃보다 할배’로 예능에도 도전해 지치지 않는 체력과 의욕 넘치는 모습으로 나이를 잊은 열정을 보여줬다. 빠른 걸음으로 ‘직진 순재’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는 세월이 흐르는 것보다, 세월이 그의 연기에 제약을 씌우는 것에 아쉬워했다. “젊었을 때는 키스신도 있고 악역도 하고 역할 폭이 상당히 넓었는데 나이가 드니 할 수 있는 부분도, 들어오는 배역도 제한이 있더라”는 것이다. 그는 “같은 할아버지라도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말했다.
연기자는 하나의 틀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연기를 시도해야 한다는 그의 연기철학은 동료·후배 연기자들에게도 많은 귀감이 됐다. 그는 2009년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연기 도전을 멈추지 않는 것에 대해 “배우의 숙명은 변신이고 도전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내가 ‘대발이 아버지’ 패턴으로 계속 연기했다면 오늘날 ‘야동 순재’도 없고 ‘김정호 대통령’(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도 없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뭔가를 만들어내야 하는 게 창조자, 예술가로서 배우의 운명이고 연기를 지속할 수 있는 힘이다.”(세계일보 인터뷰 중)
그는 지난해에 국민 배우에서 갑질 배우로 한순간에 추락한 원로 배우가 개의 말을 이해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KBS ‘개소리’로 새로운 도전을 하며 KBS 연기대상을 받았다. ‘역대 최고령 대상’이다.
‘장수상회’(2016), ‘앙리할아버지와 나’(2017), ‘리어왕’(2021) 등 연극무대에서도 열연을 펼쳤다.
제14대 국회의원(민주자유당)을 지내는 등 잠시 정치권에 몸을 담기도 했다. 또 연기자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도 꾸준히 관심을 가졌고, 최근까지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27일 오전 6시20분이며, 장지는 이천 에덴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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