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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었던 전셋집의 배신…갭투자 피해 뒤집어쓴 청춘 세입자들 [김기자와 만납시다]

입력 : 2021-05-29 08:00:00 수정 : 2021-05-28 17: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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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증금 못 받고 이사한 이웃 / 세입자 약 100명이 받아야 할 돈은 65억원 규모…경찰 “전반적인 흐름 조사” / 수탁자에 건물 넘긴 임모씨, “나도 사기 당했다”…‘갭투자’ 일각 지적에는 “그렇지 않다” 반박 / 수탁자 이모씨, “알고 보니 건물 부실채권 문제”…자신도 피해자라고 반박

 

퇴근길 누군가는 노을을 보며 강변북로를 달리고, 다른 이는 버스로 한강 다리를 건너며 창밖을 응시한다. 가는 방향은 달라도 목적지는 같다. 하루의 피로를 씻고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집이라는 곳이다.

 

평온한 휴식을 위해 집으로 향하면서도 편히 웃지 못하는 청춘이 있다. 전세 기간이 만료되고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 집을 떠날 수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늦은 밤 짐 싸던 이웃은 ‘전세 보증금’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서울 강서구 가양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2019년 3월부터 거주한 30대 A씨는 그해 11월 쓰레기를 버리고 오던 중 이웃에게 뜻밖의 말을 들었다.

 

늦은 밤 당장 이사라도 할 듯 짐을 싸는 이웃에 “보증금은 잘 받으셨느냐”고 물었더니 “말도 말라”는 답이 왔다. 이곳에 이사 올 때 1년쯤 머물다 떠나리라 작정했던 A씨는 이웃의 탄식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지금 살고 있는 오피스텔에서 전세 보증금 문제가 터졌다는 소식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보증금을 받지 못해 절망감을 호소했던 그 이웃은 어쩔 수 없이 빈손으로 나갔다고 한다.

 

불안해진 A씨는 ‘사정이 생겨 조만간 이사할 것 같다’고 문자 메시지를 임대인에게 보냈지만 답을 받지 못했다. 계획대로라면 지난해 봄 이곳을 떠났을 A씨는 1년 넘게 보증금 7000만원을 돌려받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머물고 있다.

 

서울 지하철 9호선 가양역 인근에 자리 잡은 문제의 이 오피스텔은 2010년 98가구(10층·제2종근린생활시설)로 지어져 2013년 임모(61)씨 부부가 매입했다. 당시 명의는 임씨의 남편 김모(65)씨 앞으로 됐다.

 

2019년 하반기 이사하려는 임차인들이 주인 임씨 부부에게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상경하거나 갓 독립한 20~30대가 세입자의 대부분으로 알려졌는데, 이들에게 보증금은 사실상 전 재산이자 사회 출발을 위한 종잣돈이나 마찬가지였다.

 

보증금을 받지 못하고 이사한 이를 포함해 세입자 약 100명이 받아야 할 돈은 65억원 정도. 떠난 이를 빼고 남은 60여 가구 임차인은 임씨 부부와 더불어 지난해 10월부터 이 건물의 수탁자가 된 이모(63)씨를 2개월 전쯤 경찰에 고소했다. 고소를 접수한 서울 강서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 관계자는 최근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전반적인 돈의 흐름을 조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부동산 시장에 만연한 갭투자, 90%가 넘는 전세 비율이 맞물려 이번 일이 터졌다는 게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세입자들의 법률 대리인인 한용현 변호사(법률사무소 해내)는 “이곳처럼 호실별로 등기가 분리되지 않은 다가구 주택에서는 전·월세 비율과 선순위 전세 보증금 액수 등이 신규 전세 계약자에게 제공되어야 한다”며 “하지만 임대인의 고지 의무나 처벌 규정이 없고, 임대인이 보증금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도 알 방법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번처럼) 전세 제도가 갭투자를 만나면 주거안정 기능보다 사금융의 역할이 더 커진다”며 “집주인에게 유동자금이 되는 전세 보증금은 국가 공식 가계부채로 포착되지 않는 ‘그림자 금융’이자 지하경제”라고 비판했다.

 

이런 가운데 신탁계약을 맺은 임씨 측과 이씨 측은 서로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해 문제 해결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임씨 측은 지난 25일 통화에서 “이씨에게 사기를 당해 신탁계약을 맺었다”며 “세입자들의 돈을 (대신) 지급하겠다는 약정서를 쓰기에 부동산을 넘겨줬는데 이행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신탁계약 해지를 요청하니 (이씨 쪽에서) 돈을 내놓으라고 한다”며 “(이씨에게서) 건물을 찾아온 뒤 처분해야 세입자들에게 보증금을 돌려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일각의 갭투자 지적에는 아니라고 선을 긋기도 했다.

 

임씨 측은 이씨를 상대로 신탁해지 소송을 준비 중이다. 신탁계약을 맺으면서 건물 채무 등을 해결하기로 했던 약속을 이씨가 지키지 않아서 자신도 사기 피해자라는 입장이다.

 

반면, 이씨는 같은 날 통화에서 “건물에 얽힌 보증금 문제와 약 20억원에 달하는 은행 채권 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해 90억원에 매매계약을 체결했다”며 “알고 보니 채권 이자를 1년이나 (임씨가) 내지 못해 부실채권이 되면서 유동화 기관으로 넘어갔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내가 수탁자여서) 건물 관리에만 매달 500만∼600만원이 들어간다”며 “대거 전세를 놓아서 이 사달이 났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러면서 “세입자들에게 피 같은 돈은 꼭 돌려주겠다”며 “수개월 내 반드시 정상화시키겠다”고 했다.

 

◆“두번 다시 전세는 안 갈 것”…“갭투자 피해는 서민의 몫”

 

전세는 보증금을 회수할 수 있는 데다 월세와 달리 고정적으로 큰 지출을 하지 않아도 되는 만큼 임차인들의 선호도가 상대적으로 높다. 부동산 애플리케이션 ‘직방’의 지난해 설문조사에서도 임차인(전세 임차인 98.2%·월세 임차인 66.0%) 대다수가 전세를 선호했다.

 

이런 장점에 이 오피스텔을 택했던 A씨는 “앞으로 전세로는 못 살 것 같다”며 울먹였다. A씨와 함께 인터뷰에 응한 같은 처지의 B씨는 “나중에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전세를 택했다”며 “갭투자 희생양은 서민”이라고 부동산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보증금 문제가 터진 뒤 결혼했다는 B씨는 주말 부부를 택했다.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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