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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의 자녀는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의식을 치렀다. 태반과 탯줄을 태항아리에 넣은 뒤 길지에 마련한 태실(胎室)에 봉안했다. 이러한 과정을 안태(安胎)라 했는데 왕실의 주요 의례로 엄정한 절차에 따라 진행됐다. 왕실의 태를 봉안하고 석물을 조성한 과정을 ‘태실의궤’에 기록으로 남겼다. 태주의 무병장수와 왕실의 안녕을 기하려고 태를 소중히 여겼다. 훗날 태주가 왕이 되면 ‘더하여 봉안한다’는 의미로 ‘가봉(加封)’ 태실이라 부르고 별도의 석물과 가봉비를 세웠다. 태실이 있던 곳에는 태봉산(胎封山)·태봉리 등의 지명이 생겼다. 풍수학자 김두규는 “태실을 전국 도처의 명당에 조성해 왕조의 은택을 일반 백성까지도 누리게 한다는 의도가 있었다”며 “왕조와 백성 간의 유대감을 강화시켜 보자는 일종의 통치이데올로기였다”고 했다.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은 태실의 운명조차 기구했다. ‘문종실록’에는 “동궁(단종)의 태실을 성주 가야산에 옮겨 모시고 그 사역(四域)을 정했는데, 동쪽과 남쪽을 각 9600보(步), 서쪽을 9590보, 북쪽을 470보로 하여 표(標)를 세웠다”고 했다. 이어 ‘세조실록’에는 “예조에서 ‘성주 선석산에 주상의 태실을 봉안했으나 여러 대군, 여러 군과 난신 이유(금성대군)의 태실이 그 사이에 섞여서 자리했고, 법림산(가야산 자락)에 노산군(단종)의 태실이 있으니, 여러 대군과 여러 군의 태실을 옮기고 이유와 노산군의 태실은 철거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처음 태실이 조성된 선석산에 단종 태실이 복원됐지만 내부는 비어 있다.

다른 왕실 자녀의 태실도 일제강점기·산업화를 거치면서 난개발, 도굴 등으로 상당수 훼손되거나 사라졌다. 1930년에는 일제가 왕조의 맥을 끊기 위해 전국의 태실 54위를 서삼릉으로 옮겼다.

태실 유적이 밀집된 경기·경북·충남도가 공동으로 조선왕조 태실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태실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종묘, 창덕궁, 조선왕릉과 더불어 조선 왕실 문화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인 만큼 치밀하게 준비해 결실을 거두기를 기원한다. 태실 관리에도 한 치의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박완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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