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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책과 함께 버린 허영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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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5-06 22:43:56 수정 : 2022-05-06 22:4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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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 무너지는 책에 깔려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재에 책이 쌓이고 쌓이다가 책장과 바닥은 물론이고 침실, 부엌까지 책의 홍수로 뒤덮이고 나서야 정신이 든 것이다. 며칠 고민하다가 과감히 책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안 쓰는 책’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구입한 지 오래됐지만 읽지 않았고 앞으로도 읽지 않을 책이 첫 목표. 추리·스릴러 소설 몇 권이 바로 눈에 들어와 두 번 생각할 필요 없이 박스로 넣었다. 레이먼드 챈들러만큼 소설을 쓰는 작가가 드물다는 한숨을 쉬면서. 그다음엔 외부 사정에 따라 유효성이 다해버린 서적이 타깃이 됐다. 형법·형사소송법이 주로 이런 책들이다. ‘검수완박’이니 뭐니 하면서 지난 몇 년간 법이 누더기가 돼 더 이상 교과서의 기술이 의미가 없어졌다. 정치권력의 야합으로 자고 일어나면 제도가 바뀌니 이쪽 분야 책은 몇 년 뒤에나 새로 장만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박현준 경제부 기자

버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애매한 책도 있었다. 주로 철학 번역서들이다. 가격은 비싼데 중고서점에 팔려고 보니 헐값이고, 만약에 다음에 마음이 바뀌어 책을 다시 필요로 할 땐 몇 만원을 건네야 하는 책들이다. 이런 책도 고민 끝에 버리거나 중고서점에 팔기로 했다. 대학 강단의 전문용어는 더 이상 변화무쌍한 삶을 붙잡는 데 유효한 틀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어서이기도 하고, 주머니 사정이 쪼들리는 대학생·대학원생이 싼값에 손에 넣는다면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대형 중고서점들이 참으로 책값을 후려친다고 투덜거리면서 팔아넘기기로 했다.

사놓고 한 번도 읽지 않아 표지가 반들반들한 새 책도 우르르 쏟아졌다. 가령 미적분에 관한 수학책. 고등학교 졸업 이후 수학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덜컥 사버린 모양이다. 아마 이 책을 ‘언젠가’ 읽는다면 더 지식이 늘어날 거란 착각, 그리고 그걸 책이란 물질형태로 확보하고 싶은 욕심에서 저지른 사태였을 것이다. 수학은 중요하지만, 그걸 떠나서 굳이 안 갖고 있어도 될 책을 쌓아놓고 있었다는 후회감이 밀려왔다.

책을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서재와 집이 더 넓어 보인다. 아마 그 공간만큼 나의 허영심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책이 있든 말든 나는 그대로인데, 책으로 나를 장식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주기적으로 책이든 뭐든 기준을 세워서 버리기로 했다. 물론 이렇게 마음먹고도 언제 또 욕심에 지갑을 맡길지 모르겠지만. 며칠 전에도 벌써 서점에 들러 책을 뒤적인 걸 보면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자리를 차지하려는 전쟁이 한창이다. 용케 한 자리를 거머쥐었든, 아직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든, 그 자리를 본인을 위한 장식품으로 여기는 인물은 공직에 가지는 말았으면 한다. 책 사 모으는 버릇이야 출판사 경영에 도움이라도 되지만 무능력한 사람이 공직에 있으면 온 국민이 피해를 보지 않는가. 때로는 공직의 무게에 깔려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있으니 혼자 웃어넘길 일도 아니다.


박현준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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