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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만점이 기본… 기이한 ‘별점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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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6-06 23:20:40 수정 : 2022-06-06 23: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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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신용카드 배송 직원이었다. 그는 “곧 고객님 자택에 도착할 예정”이라며 내 위치를 물었다. 평일 오후에 집엔 아무도 없었다. 우편함에 넣어 놓으면 알아서 가져가겠다고 심드렁하게 답했다. 어차피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 뒤 또 전화벨이 울렸다. 아까 그 번호였다. 우편함에 넣어놓기엔 영 불안하다는 것이었다. 곧 집에 도착하니 괜찮다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관문 틈에 끼워두겠다”고 했다. 굳이 2개층을 걸어 올라간 그는 다시 내게 전화를 걸었다. “에어컨 실외기 뒤편에 잘 숨겨뒀다”는 목소리는 의기양양하게 들렸다. 전화를 끊기 전 직원은 “서비스 만족도 조사 문자 잘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신용카드 하나 배송하는 것치곤 필요 이상의 친절이었다.

백준무 사회부 기자

‘보다 나은 서비스를 위해 활용하겠다’는 조사는 총 6개 항목으로 이뤄져 있었다. 배송 직원이 친절했는지, 배송 직원의 용모와 복장은 단정했는지, 배송 직원이 카드 전달 시 본인확인 절차를 시행했는지 따위의 질문이었다. ‘매우 나쁜 편’부터 ‘나쁜 편’, ‘보통이다’, ‘좋다’, ‘매우 좋다’까지 5개 점수를 매길 수 있었다. 먹고살기의 팍팍함에 대해 곱씹으며 모든 질문에 ‘매우 좋다’고 답했다. 다른 고객도 대개 그럴 것이다.

비단 특정 카드 회사만의 경직된 평가 시스템이 아니다. 가전제품 애프터서비스 기사가 수리를 마친 뒤 고객에게 ‘5점’을 부탁하는 모습도 익숙하다. 어느샌가 우리 사회 전반에 자리 잡은 기이한 평가 시스템이다. 0점에서 출발해 가점을 받아 만점을 획득하는 게 아니라, 만점에서 흠을 잡힐 때마다 감점 당한다. 완벽하지 않으면 문제가 된다.

‘배달의 민족’이나 ‘요기요’ 같은 음식 배달 플랫폼을 봐도 그렇다. 언제부터 한국에 맛집이 이렇게 많았을까. 거의 모든 가게 평점이 5점 만점에 4점 중반대다. 업주들은 ‘서비스’를 미끼로 5점 리뷰를 당부한다. 지인 혹은 아르바이트를 고용해 가짜 리뷰를 쓰는 사례도 빈번하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온라인에는 ‘4점 이하 가게는 믿고 걸러야 한다’는 팁 아닌 팁까지 떠돈다. 고객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만으로 일부러 낮은 별점을 매겨 전체 평점을 낮추는 ‘별점 테러’가 가능해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5점 만점을 근간으로 하는 이른바 별점 평가 시스템은 1820년 영국 작가 마리아나 스타크가 펴낸 여행 가이드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1960년대 미국의 영화 평론가 레너드 말틴은 비슷한 평가 제도를 영화계로 끌고 왔다. 복잡한 세상을 5단계로 간단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세상을 단순하고 편리하게 만든다. 무한경쟁의 소비자본주의 사회 곳곳에서 별점은 선택의 기준이 되는 지표로 자리 잡았다.

200년이 지난 지금, 별점의 권위는 무너졌다. ‘만점의 홍수’ 속에 평가의 정확성이나 변별력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그 만점을 받기 위해 별점을 조작하고 직원을 갈아 넣는다. 또 다른 누군가는 평가자의 권위를 빌려 피평가자를 향해 ‘갑질’을 한다. 무의미한 만점을 위해 오늘도 우리는 별점을 매긴다.


백준무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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