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독일군 돌격대원들이 철조망 장애물 지대를 통과하는 훈련을 하고 있다. |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피터 심킨스 외 지음/강민수 옮김/플래닛미디어/2만9800원 |
왜 일어났나. 2차 대전과 마찬가지로 1차 대전의 원흉도 독일이다. 1870∼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은 유럽의 강자로 급부상한다.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는 교묘한 외교술로 프랑스를 고립시켜 대륙을 안정시킨다. 그러나 그가 물러나며 호전적이던 빌헬름 2세가 즉위하자 상황은 돌변했다. 지레 겁을 먹은 프랑스·영국·러시아가 손을 잡고 독일을 고립시킨 것. 이에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동맹을 맺어 고립상태를 타개하려 한다. 이에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그리고 오스만투르크의 이해관계가 교묘하게 얽힌 발칸반도가 화약고로 변한다. 마침내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세르비아 테러리스트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터졌다. 전쟁을 부른 것이다.
어떻게 싸웠나. 전쟁에 굶주려 있던 독일은 ‘슐리펜 계획’을 이미 세워놨었다. 그것은 전쟁이 발발하면 러시아가 병력을 동원하는 데 걸리는 6주 안에 서부전선(프랑스)을 평정한 뒤 군대를 동부전선으로 신속히 이동시켜 러시아를 제압한다는 내용. 그러나 오판이었다. 서부전선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독일은 동부와 서부 양쪽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러야 했고, 때로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돕기 위해 남부에서도 싸워야 했다. 영국전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초기 영국을 효과적으로 봉쇄하던 독일의 무제한잠수함 작전은 오히려 미군의 참전을 초래함으로써 패전의 직접적 원인이 된다.
전쟁의 뒷모습. 개전 초기 유럽 여러 나라의 국민은 전쟁에 열광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인명 살상 등 피해 규모가 커지자 염전사상과 반전운동이 확산했다. 이탈하는 병사의 수가 급증했고, ‘죽지 않을 정도의 중상’을 입어 후송되기만을 기다리는 병사들도 하나 둘 늘어났다. 일부 전선에선 크리스마스를 맞아 적군인 영국군과 독일군이 함께 사진을 찍고 선물을 교환하며 축구시합까지 즐겼다. 전선에 따라서는 굳이 서로를 죽이지 않으려는 비공식 휴전도 암암리에 이루어졌다.
◇1918년 11월 11일 영국 버킹엄 궁전 바깥에 모여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기뻐하는 런던 시민들. |
전쟁이 가져다준 것. 전쟁은 가공할 파괴와 함께 엄청난 기술적 진보를 가져다주었다. 대표적인 것이 의학과 예술 분야다. 부상병을 최대한 빨리 회복시켜 다시 전선에 투입하기 위해서 혹은 건강한 국민을 더 많이 전장에 끌어가기 위해서 의학은 중요했다.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프로파간다와 비참한 현실로부터 탈출하려는 예술인들의 욕구는 역설적이게도 뛰어난 예술을 탄생시켰다.
남녀평등시대의 초석. 여성까지 끌어들인 전쟁은 불가피하게 여성의 참정권을 강화시켰다. 전사한 남자들을 대신해 전장에 동원된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권리에 대한 목소리를 높였고, 이를 억압하던 남성들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여성참정권 투쟁에 앞장선 팬크허스트 여사의 “1차 대전은 여성을 지배해온 남성들에 대한 신의 복수”라는 주장도 먹혀들었다.
전쟁의 부산물. 1차 대전은 러시아 공산주의를 낳았고, 20년 후에 지구촌을 불구덩이로 만든 2차 대전을 잉태했다. 전투마다 연패한 러시아 니콜라스 2세는 국민의 신임을 잃었고 식량난으로 폭동이 발생하자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 틈에 스웨덴에 망명해 있던 레닌은 독일의 지원을 받아 ‘역사의 비밀열차’를 통해 귀국, 러시아혁명을 주도한다.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을 탄생시킨 것이다. 한편, 베르사유 조약은 1차 대전을 중단시켰지만 깔끔하지 못한 전후 처리로 새로운 전쟁의 불씨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전쟁에 동원된 식민지의 독립과 자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미국이 외면한 국제연맹은 1930년대를 별러온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야욕을 막을 힘이 없었다. 1차 대전은 결국, 2차 대전으로 가는 징검다리이자 미완의 전쟁이 된 셈이다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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