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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지역 민속생활사 복원, 부담크지만 주민들 보며 각오 다져”

입력 : 2009-09-02 09:58:48 수정 : 2009-09-02 09:5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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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서 8개월째 체류 연구중인 국립민속박물관 박 선 주 학예사 “박 박사, 어디 가?”

“저 어디 안 가요. 경로잔치 준비하는 거 둘러보려고요.”

지난달 29일 충남 부여군 은산면 은산1리. ‘2010 충남민속문화의 해’의 자료수집과 연구를 위해 8개월째 마을에 머물고 있는 박선주(45)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가 마을회관 근처 숙소를 나서자 지나는 주민들이 한마디씩 건넨다. 이날은 매년 칠월칠석 즈음 열었다는 마을 경로잔치가 있는 날. 특히 은산마을 살림살이 조사 대상 가구인 선옥네 김희순(51)씨로부터 전화로 “고기 무칠라고 하니께 얼릉 나와 사진 찍어”란 귀띔까지 받은 터라 마음이 바쁘다. “조반 전부터 마실 가나벼?” 박 연구사는 그가 한 달 전부터 추석 차례상을 보여 달라고 졸라대고 있는 아저씨가 인사말을 건네도 “추석 때 뵈어요” 하고 마을회관 쪽으로 종종걸음을 친다.

◇김진형 연구원(가운데)이 은산별신제 무녀 보유자인 황남희씨 성주풀이를 채록하고 있다.
◆“은산리는 제2의 고향”=마을회관은 부녀회와 청년회 아주머니, 아저씨들의 잔치 준비로 벌써 북새통이다. 회관 앞에 솥 3개를 걸어놓고 미리 개 2마리와 닭 10마리를 삶아놓은 게 어제 상황. 음료수를 건네는 누군가의 손길을 보지 못한 듯, 박 연구사는 벌써 찢어서 갖은 양념을 한 개고기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아주머니들이 설명하는 음식 조리법을 받아 적느라 쉴 틈이 없다. 이정연(57) 부녀회장이 “애쓰는 게 딱해 죽겠다”고 하자, 오은옥(58) 의용소방대장은 “박 박사 풍기는 게 외지 사람 같질 않고 살가워”라고 농을 건넨다. 그는 전임 청년회장 이성원(42)씨 등이 가져온 술과 음료수 출처를 묻는가 싶더니, 어느새 동네 아주머니들을 따라 인절미와 콩고물 등 잔치떡을 맡겼다는 ‘형제방앗간’으로 향하고 있다.

‘동네 잔치에 한 집에만 맡길 수 있나’란 이유로 밥 두 말은 ‘은산방앗간’에서 가져오기로 했다. 박 연구사는 내친김에 은산방앗간에 들러 준범 엄마(양미자·56)에게 거듭 나무로 된 보리·밀 찧는 기계를 박물관에 팔라고 종용키로 다짐한다. “지도 다 생각해놓은 게 있구먼요.” 70년 세월이 켜켜이 쌓인 보리 기계를 바라보는 박 연구사의 애처로운 눈길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준범 엄마는 의뭉스럽게도 박 연구사를 처음 봤던 올 2월 때 기억과 우리 밀을 재료로 해서 옛날 방식으로 빚을 누룩 얘기로 화제를 돌린다.

“박사님이 처음 찾아왔을 때, 거 뭣이냐, 현대 회장님 있잖아요? 눈매가 선하고 인상이 부드러운 게 영락없는 현정은 회장이라니깐. 보리 기계는 좀 먹고 깨지고 남루한 게 남에게 내놓기가 창피스럽구먼요. 보리 기계는 못 혀도 내 (전북) 군산 시누이가 직접 기른 우리 밀로 누룩 빚는 것은 꼭 보여줄라니깐 연락하면 바로 오세요.”

박 연구사는 아쉬움을 달랠 요량인 듯 인근 ‘대동국수’로 향한다. 60년 넘게 전남 신안 꽃소금으로 반죽을 해서 뽑은 면을 볕에 말려 팔고 있는 은산의 몇 안 되는 국수집이다. 아버지 뒤를 이어 2대째 대동국수를 운영하고 있는 이정민(46)씨는 부인과 함께 전날 4500만원을 들여 교체한 면 뽑는 기계를 시운전하고 있다. ‘잘 뽑히냐’고 묻자 이씨는 “잘 되네요” 시큰둥한 목소리면서도 만면에 미소다. 대동국수는 도로 건너편 ‘은산국수’와 더불어 한때 제분소에 국수집까지 겸했던 은산방앗간 직원들이 독립해 차린 국수집이라고 박 연구사는 귀띔했다.

지금이야 은산면장이 언제부터 며칠간의 교육에 들어갔고, 이장 김주영(59)씨가 왜 일주일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지 속속들이 꿰뚫고 있는 ‘은사마을’ 사람이 다됐지만 박 연구사는 김진형(31) 연구원 등 조사팀과 함께 처음 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인 설날 직전의 찬바람을 잊지 못한다. 조사팀이 상주하기 앞서 “서울 박사님들이 1년 동안 마을 생활·전통 문화를 조사할 예정이니 적극 협조를 바란다”는 군청 설명을 들었던 주민들이지만 “설마 1년씩이나?” 같은 심드렁한 표정이 역력했더랬다. 은산별신제(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9호)가 열리는 ‘3월이 지나면 올라가겠거니’ 했지 싶기도 하다.

◇박선주 연구사가 ‘대동국수’ 설립자인 이용승씨로부터 새 면뽑는 기계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오브제 아닌 사람 사는 집 보여=어촌마을인 서천군 서면 월하성리(김희수 학예연구사팀)와 더불어 충남의 집중 조사지로 선택된 은산1리는 그에겐 여전히 갈피가 안잡히는 ‘제2의 고향’이다. 은산이 농촌·어촌·산촌 등 생업을 자연과 함께하는 그간의 조사지역과 달리 한때 상업이 번성했으나 지금은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면소재지 마을인 까닭이다. 박 연구사는 “여전히 마을 곳곳에는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로 중석광산과 은산모시 등으로 번화했던 옛 흔적이 남아 있다”면서 “워낙 인구 유동이 심한 곳이라 1970년대와 2000년대 사이의 생활사 공백을 잇는 게 최대 관건”이라고 토로했다.

특히 마을 내 한 가정을 선택해 1년간 집중조사하는 ‘살림살이’는 의식주와 관계된 모든 살림살이, 심지어 속옷, 생리대까지 조사하고 각 물건에 얽힌 내밀한 사연까지 담아내야 하는 까닭에 더욱 부담이 크다. 박 연구사는 전통가옥 전문가답게 1946년 지었다는 황인용(53)·김희순씨 부부의 전통 가옥형 살림집에 꽂혀 이들 부부를 살림살이 조사 대상으로 삼겠다고 다짐했다. “올 4월쯤 서천에서 얻어온 잡종개 ‘보신이’로 환심을 사고 한 달 뒤 민속문화의 해 전북편을 슬며시 건넸지요.”

희순씨는 밭일이 끝난 뒤 돌아와 보면 어김없이 부엌에서 쌀을 안치고 틈틈이 말동무를 해주며 부모 품을 떠난 두 딸의 빈자리를 메워준 박 연구사의 정성이 고마워서 살림살이 조사를 승낙했다. 박 연구사의 정성을 엿볼 수 있는 일기의 한 대목. “선옥네 마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함. 내 집 부엌처럼 들어가서 밥과 김치찌개를 준비. 8시쯤 저녁 자리가 파하고 난 설거지. 선옥 엄마는 인천공항에 도착한 딸이 어떻게 마을에 오는지 안절부절. 서울 남부터미널까지 왔는데 오는 직행 버스가 끊겨 공주에 11시30분쯤 도착하는 버스를 탔다고. 숙소에서 잠깐 씻고 선옥 엄마한테 딸과 잘 만나서 오고 있는지 궁금해서 전화함.”

건축공학 전공자로 지난 20여년간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하루 5∼10채씩 민가와 한옥을 살펴봤다는 박 연구사는 2001년 민속박물관에 발을 들여놓은 뒤 충격에 휩싸였다. 며칠 동안 경북 안동 한 종가의 제사 과정을 지켜보다가 ‘오브제’가 아닌 ‘집’을 발견했고 그 집이 사람을 위한 공간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그는 “하드웨어(가옥)를 보기 전 소프트웨어(주생활)를 먼저 살피게 된 최초의 경험”이라며 “지나치게 가옥 위주로 살폈던 내가 민속학을 만나 주생활 부분을 보충했듯이, 이번 조사에서는 생업과 살림살이 등과 같은 새 영역의 충격을 만끽하고 있다”고 했다.

부여=송민섭 기자 stso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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