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금 가고 ‘광인 전략’ 효과 반감
미·중 갈등, 5개국 조기 협상도 미궁
韓 이념·정파 넘어 내부결속 다져야
기자는 18년 전 한국의 대외협상 실상을 취재한 적이 있다. 한국협상학회 회원에게 외환위기 이후 10년간 국민적 관심사가 컸던 13개 대외협상에 대해 물어봤더니 협상평가가 낙제 수준(100점 만점에 37.3점)이었다(2007년 2월 세계일보 탐사보도 ‘한국 대외협상력리포트’). 협상전문가들을 만나보니 우리 인력의 자질과 능력만 따지면 미국 무역대표부(USTR)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했다. 정부 부처의 통상담당 관료도 “이제 모르는 기법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왜 평가는 박했던 걸까.
협상 이론에서 내부의 의견 차이를 조율해 한곳으로 모으는 내부협상은 대외협상의 향배를 가름하는 핵심변수라는 게 정설이다. 기본이 망가지면 대가는 혹독한 법이다. 한·중 마늘(2000년), 한·일 어업(1998년), 용산 미군기지 이전(2003∼2004년) 등에서 보듯 많은 협상은 이면·비밀 혹은 졸속·부실합의로 얼룩지며 국익훼손과 국부 유출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민간의 저항과 반발은 거셌고 협상 주역들이 자진 사퇴하거나 경질되는 사례가 허다했다.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던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조차 국회 비준과정에서 극심한 진통을 겪었다. 정부 스스로 민간의 참여를 배제하는 ‘비밀주의 관행’이 화를 부른 것이다.

협상의 달인이라 불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도 내부협상의 덫에 걸린 듯하다. 트럼프는 이달 초 60여개국을 향해 10∼49%의 상호관세를 물리겠다며 관세전쟁에 돌입했다. 해외뿐 아니라 자국에도 충격과 공포가 덮쳤다. 당장 미 주식·채권·외환시장이 혼돈에 빠졌다. 글로벌 자금이 미국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달러화 패권지위마저 흠집이 났다. 월가와 산업계에서는 ‘미 역사상 최악의 자해극’이라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조차 “예상보다 관세율이 높다”며 물가상승과 성장둔화를 걱정했다.
민심도 들끓었다. 미 전역에서 반트럼프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지지율도 취임 100일 만에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낮은 40% 안팎까지 곤두박질쳤다. 뉴욕 등 12개 주는 관세정책을 중단하라는 소송까지 냈다. 다급해진 트럼프가 아침저녁으로 말을 바꾸자 ‘양치기 소년’이라는 조롱까지 나오는 판이다. 시장과 민심이 등을 돌린 상황에서 예측불허의 행동으로 상대방을 겁박해 잇속을 챙기는 ‘미치광이 전략’이 통하기 어렵다.
트럼프가 미·중 무역갈등에서 쩔쩔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은 중국의 보복조치를 이유로 대중 관세율을 145%까지 올렸지만 “중국은 가장 큰 (무역) 학대국”이라고 했던 겁박은 얼마 가지 못했다. 트럼프는 관세율 인하를 시사하며 “중국과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과 여러 차례 통화했다”고 꼬리를 내렸다. 중국은 “그런 적이 없다”,“가짜뉴스”라며 요지부동이다. 국제사회에서 ‘슈퍼 갑’으로 완력을 과시하던 미국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트럼프는 한국·일본·인도·호주·영국 등 5개 우방국과 협상을 서두르고 있지만 이마저 여의치 않다. 그는 1호 협상국 일본과 협상에 등판해 ‘무역적자 제로’, ‘관세와 방위비 연계’를 압박했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성급하게 협상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며 거리를 뒀다. 2∼3개월 내 90개국과 무역협정을 체결하겠다는 트럼프 측의 공언도 공염불에 그칠 공산이 크다.
한·미가 지난주 ‘2+2(재무·통상)협의’를 열어 협상의 첫발을 뗐다. 의제가 관세·비관세조치, 경제안보, 투자, 환율로 설정됐는데 곳곳이 지뢰밭이다. 미국 내 정세와 트럼프 협상 입지 등을 봐가며 현안마다 득실을 따져 국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짜야 한다.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가뜩이나 계층·지역·세대 간 대립과 반목이 심한데 6·3 대선까지 겹쳐 사회갈등과 국론분열은 증폭될 소지가 다분하다. 미 외교가의 대부 헨리 키신저는 “당신 집안을 정리하지 않으면 남과 효과적으로 협상할 수 없다”고 했다. 이제 좌와 우, 진보와 보수 등 이념·정파를 떠나 내부결속을 다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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