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문 안열던 두 장르 대화를 통해 경계 허물어 이 시대의 예술은 길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길이 너무 많아서 문제다. 그러니 예술로 통하는 모든 길을 스스로 확인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그러다 막다른 길에 다다르면 다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다시 첫발을 떼야 한다. 시작과 끝의 무한한 반복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인 이원의 시집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를 읽고 이미지화해 낸 화가 윤종석의 작품 ‘산다는 것’. |
그때, 그렇게 숨 막혀 하던 그때, 우연히 한 권의 소설을 만났다. 복잡한 머리를 식힐 겸 집어 들었던 그 한 권의 책. 생각해보니 나는 그 소설을 읽고 있던 것이 아니라 그 소설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박준헌 미술이론·Art Management Union 대표 |
인터알리아의 ‘그림에도 불구하고’전(4월1일까지)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현대미술은 언제부터인가 개념과 자본이라는 안개에 휩싸여 당장의 눈앞이 가로막혔다. 그런 연유로 한 권의 책, 즉 문학에 그 길을 물어보고자 했다. 글과 이미지라는 표현 방식을 넘어, 매체의 속성을 넘어 서로의 자장 안으로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가고자 했다. 그것은 마치 서로의 ‘앎’에 대해 사랑에 빠지듯 자연스럽게 시작되었고, 스미면서 미끄러졌다. 그렇게 해서 다섯 명의 화가 윤종석, 이길우, 이상선, 변웅필, 정재호와 다섯 명의 문인, 시인 이원, 김민정, 신용목, 소설가 김태용, 백가흠이 만나게 되었다. 운명처럼 그렇게.
우리는 전시를 하고 책을 발간하기로 합의했다. 문인들은 미술작품을 언어화하고, 화가들은 문학작품을 이미지화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부터 시작하자고 요구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미술작품을 언어화하고 문학을 이미지화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서로의 장르라는, 그 오랜 시간에 걸쳐 다져지고 견고해진 그 성은 쉽사리 외지인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문학이라는 것은, 미술이라는 것은 그렇게도 강인한 역사였다.
다행스럽게도 이 과정에서 그들은 많은 대화를 나눴고, 이를 통해 서로의 ‘예술의식’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결국 서로의 길이 같은 방향이라는 것 또한 확신하게 되었다. 이를 개별성이라 부를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우리는 좀 더 풍성하고 찬란한 또 다른 ‘나’들과 대면할 수 있었다. 서로의 시집과 소설을 그리고 화집을 돌려보면서, 서로가 쓰고 그려야 할 대상을 결정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예술의식’의 경계를 허물 수 있는 매혹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고마운 일이다. 이들에게 무한한 존경을 보낸다.
(02)3479-0114
박준헌 미술이론·Art Management Union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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