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미약했다. SBS ‘샐러리맨 초한지’에서 진시황(이덕화 분) 회장의 곁을 지키며 야욕의 발톱을 숨겼던 때만 해도 모가비 역을 맡은 김서형의 존재감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진 회장을 죽이고 회장 자리에 대한 욕심과 허세를 드러내면서 그녀의 진가는 빛을 발했다.
“나중에 반전이 있을 거라는 얘기만 들었어요. 미리 대본을 받아보지 못해 뒤에 어떤 반전이 올까 궁금해 하고 있었죠. 솔직히 이런 반전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어요. 모가비의 야망이 넘치다 못해 아예 다른 방향으로 가거나 장량과 범증 사이에 깨알 같은 장면이 있어 그런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까 했는데 예상 밖의 반전이었어요.”
모가비가 진회장의 유서를 조작하고 살해한 장면은 ‘초한지’의 하이트라이트로 꼽힌다. 더불어 모가비가 본색을 드러내자 시청률도 상승했다. 이에 김서형은 “그건 저 아니었더라도 히든카드를 누구에게 주느냐에 달라졌을 것”이라며 손을 저었다.
“히든카드를 다른 누군가에게 줬더라도 시청률이 올라갈 상황이었던 거 같아요. 대본상 극 흐름에 중요한 히든카드가 모가비였다는 사실이 감사하죠. 진회장의 죽음은 극의 터닝포인트라고 생각했어요. 이덕화 선배님과 NG 한 번 없이 갔던 장면인데 방송을 접하고 깜짝 놀랐어요. ‘내가 저렇게 사람을 잘 죽였나’라는 생각에 내심 무섭기도 했어요.”
김서형은 전작 ‘아내의 유혹’ ‘자이언트’ 등 처절하리만큼 독한 캐릭터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그간 작품들을 통해 캐릭터의 악한 본성을 소름 끼치게 그려내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 ‘초한지’에서도 권력욕에 사로잡힌 모가비 캐릭터는 배우 김서형을 만나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부여받았다. ‘악역 연기만큼은 김서형’이라는 시청자의 극찬이 쏟아졌지만 정작 김서형은 “모가비가 악역이었냐”고 반문했다.
“모가비가 남자였더라도 이렇게 미움 받았을까요? 진회장이 수족같았던 최측근 비서에게 부사장 제의라도 했다면 죽이려는 맘까지 먹었을까요? 그런 상황에서 모가비는 과감했던 같아요. 모가비가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 일련의 과정이 이해가는 측면이 있어요. 모가비가 호박씨 안 까고 직접적으로 야망을 드러내는 캐릭터라 더 손가락질 받았지만 그를 악역으로만 몰아갈 수 있을까 의문이 생겼어요.”대를 세운 채 임직원들을 몰아붙이는 모가비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빨려들었다. 유독 호통 장면이 많았던 모가비 캐릭터를 연기하며 체력적, 정신적 소모도 상당했으리라.
“‘아내의 유혹’ 신애리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만 질렀다면 ‘초한지’에선 포인트만 주려고 했어요. ‘회장 모가비’일 때 호통으로 포인트를 줬다면 나머지는 대사를 던지는 식으로 편안하게 갔어요. 사실 호통 칠 때 신애리가 보이지 않을까 신경쓰였어요. 캐릭터에 따라 대사 톤을 달리 가져가자 마음 먹었죠.”
‘초한지’에서 모가비의 카리스마는 위록지마, 샤론스톤을 연상시키는 패러디 장면에서 극대화 됐다는 평이다. 이중 치명적인 섹시미로 수사관을 압도했던 샤론스톤을 패러디하면서 부담스럽진 않았을까. 김서형은 “재미있었지만 아쉬움도 남는다”고 털어놨다.
“대본 보고 빵 터졌어요. 어떻게 섹시하게 찍을까 고민도 했죠. 그런데 촬영 스케줄에 쫓기다보니 조금 아쉬운 장면이 됐어요. 섹시하면서도 지적인 의상을 준비했는데 걸치고 온 코트를 벗지 못한 것이 아직까지 아쉬워요. 코트를 벗을지 말지 감독님이 선택권을 주셨는데 감독님께서 '벗으면 쇼걸 같지 않겠냐'고 하셔서 그냥 입고 찍었는데 말이죠(웃음).”
‘아내의 유혹’ ‘자이언트’ ‘굳세어라 금순아’ 그리고 ‘초한지’까지 김서형의 출연작 가운데 실패한 작품을 찾기 힘들다. 김서형은 ‘초한지’의 성공으로 더욱 굳건해진 ‘시청률 제조기’라는 평가에 “작품 운이 좋았다”고 공을 돌리면서도 “언젠가 연기로 대상을 받고 싶다”고 연기 욕심과 애정을 드러냈다.
“저 아닌 배우가 연기했더라면 ‘다른 누군가의 모가비’가 됐을 거예요. 시청률 스코어가 좋았던 건 운 좋게 좋은 작품을 만난 덕이죠. 저는 연기 대상을 꿈꿔요. 좋은 작품과 캐릭터를 만나 대상을 받는다면 ‘배우 김서형’의 가치를 인정받는 기분이 들 것 같아요. 시청률 높은 작품은 많았는데… 언제쯤 대상을 터뜨릴 날이 올까요?”
정은나리 기자 jenr38@segye.com
사진=한윤종 기자 hyj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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