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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 무맥] (24) 일본에서 다시 돌아온 화랑무예 합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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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2-16 21:37:46 수정 : 2010-02-16 21:3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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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서 출발… 최근 연구 결과 신라가 뿌리 드러나
일본서 수련했던 최용술씨가 대구서 정착시켜
타무술 장점 살려… 태권도와 함께 전세계 번져
한국에서 태권도 다음으로 일반에 널리 알려진 무술이 합기도(合氣道)다. 그런 만큼 합기도가 한국 무술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아마도 창시 무술을 표방하는 무술의 6할이 합기도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합기도는 한마디로 합기(合氣)를 하는 무술이다. 그렇다면 다른 무술도 기공을 다 활용하는데 합기도는 어떻게 기공을 운영하기에 이름 자체를 ‘합기’라고 표방하고 있다는 말인가. 

합기도는 흔히 일본무술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분명히 한국의 합기도는 일본 합기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대동류합기유술(大東流合氣柔術)이라는 고류유술(古流柔術)에서 독자적으로 갈래진 것이다.

◇합기도는 원의 무술이다. 그래서 화원류의 기술에 모두 능해야 달인이 된다.
일본의 아이키도나 대동류 합기유술의 사범들도 한국의 합기도는 대동류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합기도의 원류가 신라의 화랑무예라는 연구 결과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합기도는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본국으로 돌아온 셈이 된다. 이는 많은 일본 문화요소들이 실은 신라, 가야, 백제, 고구려 등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이 대부분이라는 설과 부합한다. 고대 문화의 흐름으로 볼 때 이러한 주장은 폭넓게 지지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연구를 거듭할수록 증명되고 있는 터이다.

한국에서 근대 합기도의 출발지는 대구이다. 부산과 대구가 여러 무술의 출발지가 되는 까닭은 광복 후 많은 재일한국인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는 선상에 이들 두 도시가 처음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곧바로 이어진 동족상잔인 6·25전쟁의 와중에서 두 도시가 유일하게 북한군의 점령을 면한 남한의 최후방어선이 된 까닭이다. 합기도의 도주(道主) 최용술(崔龍述·1899∼1986)도 이러한 실존적 상황 속에서 대구에 정착하게 된다.

일본에서 합기도를 익힌 최용술은 광복 후 귀국길에 올라 고향인 충북 황간으로 돌아가던 길에 짐 가방을 분실하고 여비가 떨어져 그만 대구에서 정착한다. 대구에서 생활하던 최용술은 달성공원 근처 양조장을 찾게 되는데 그곳에서 약간의 시비가 붙게 된다. 그때 덩치가 큰 젊은이를 왜소한 체구의 그가 손목을 가볍게 뒤집어 비트는 것으로 제압한다. 이를 이층에서 지켜보고 있던 양조장 사장의 아들 서복섭이 그 자리에서 쌀 몇 섬을 주고 무술을 배운다. 그날부터 서복섭은 그의 첫 제자가 된다. 그해가 1946년이다. 최용술은 당시 대구 덕산동 염매시장 골목에 위치한 자택 모퉁이에 지붕과 벽이 전부 가마니로 둘러쳐진 4평짜리 도장에서 수련했다. 서씨는 51년까지 혼자서 합기도를 배운다. 

최용술은 14세 되던 해인 1913년 다케다 소가쿠(武田忽角)의 문하에 들어간다. 최용술은 약 3년간 일본 전역을 순행하면서 일본을 배우게 되는데 이때 일본 아이키도의 창시자인 우에시바 모리헤이(植之盛平)를 만난다. 최용술은 1917년 소가쿠를 따라 대동류 최고의 기법을 배우기 위해 입산하게 된다. 이때 최용술 외에 북해도인인 임금씨(林金氏), 동경인인 산본씨(山本氏), 구주인인 삼본씨(森本氏), 궁본씨(宮本氏) 등 일본인 4명이 동행하게 되는데 7년간의 수련을 통해 남은 사람은 최용술 한 사람뿐이었다. 최용술은 1923년 하산하여 스승과 함께 대동류를 세상에 알리는 데 앞장선다. 이때 대동류를 익힌 사람들은 일본 황실의 황족과 귀족들이었다. 1943년 스승이 세상을 떠나고 광복이 되자 최용술은 한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따라서 대동류의 적통은 고스란히 한국으로 오게 된다.

이는 매우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최근 무예연구가 이병선의 연구조사에 따르면 대동류는 일본으로 건너간 신라의 후예 삼랑의광(三郞義光)이 시조이고, 그는 일본이 혼란에 빠졌을 때, 거병하여 큰 전공을 세워 일본 황실로부터 무전(武田)의 성을 받았으며, 그의 무술이 다케다 가문에 전해져 중시조격인 35대인 소가쿠에 이어지고, 다시 천신만고 끝에 신라의 후예, 선산(善山) 사람 최용술에 전해진 때문이다. 신라의 무예가 천여 년의 세월을 넘어 최근세에 다시 신라의 땅, 한국으로 돌아온 셈이다.

최용술은 제자들에게 흔히 말하곤 했다.

“너희가 하는 수련은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수년간 입산 수련할 당시 다케다 소가쿠 스승으로부터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두들겨 맞았다. 꼭 부엉이같이 생긴 소카구 선생이 너무 보기 싫어서 잠을 잘 때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을 숱하게 느꼈다.”

◇‘영남의 호랑이’란 별명을 가진 합기도의 달인 김정수 선생.
다케다는 유술 고수이기에 앞서 일본 검(劍)의 대가였다. 항상 닛폰도(日本刀)를 이부자리 옆에 놓고 잠을 청했는데 인기척만 들리면 잠결에도 어느새 검에 손이 가 있었다고 한다. 최용술은 한국으로 돌아올 당시에 이미 대동류 수제자의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여러 동료 제자들로부터 “한국에 일본 무술이 들어가게 할 수는 없다. 돌아가려거든 팔 하나를 떼어 놓고 가라”는 협박도 받았다.

그러나 최용술은 이미 그들을 제압하고도 남을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다케다 스승은 종종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검술은 내가 최고요, 맨손 기술은 네가 으뜸이다.”

최용술은 임종을 앞둔 소가쿠 스승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유언을 듣는다.

“네가 한국인(조선인)으로 설움을 많이 겪고 고생이 많았다마는 우리 조상도 한국인이다. 이 무술은 한국에서 건너온 것이다.”

다케다 가문의 시조는 신라사부로(新羅三郞)라는 이름의 무사이다. 이는 일본 무사의 뿌리가 신라계임을 증명하는 자료가 되는 한편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 무사도도 실은 한국의 무사도, 예컨대 신라의 화랑도가 일본에서 토착화과정을 거친 것으로 해석된다. 일본의 중파 적산궁(赤山宮) 지역이 장보고의 후예인 신라계 이주민의 거주지로 밝혀졌다. 장보고의 시대에 신라삼광 원의광(장보고는 유술을 수련하지 않았음)이 대동류를 전했다고 보여진다. 이는 장보고의 상징물과 신라삼광 원의광과 무전신현(武田信玄), 대동류합기유술 종가의 상징물인 깃발무늬가 동일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동(大東)이라는 명칭은 장보고 시대에 발해와 신라의 압록강 지역 경계선을 대동구(大東溝)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무사를 부르는 호칭도 일본 천태종의 좌주인 자원(慈圓)의 저서 우관초(愚管抄)에 표기된 것에 따르면 실은 일본의 ‘부시(bushi)’보다 한국의 ‘무사’라는 것이 더 가깝다는 것이다. 한국의 합기도는 마치 태어난 곳을 찾는 귀소본능의 회유어(回游魚)처럼 오랜 세월의 바다를 건너 처참할 정도로 피폐한 한국에 돌아왔던 셈이다. 합기도는 한국인의 상무정신뿐만 아니라 가난한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삶의 원동력을 불어넣어준 무예이다.

서복섭씨는 대구의 명문가인 서동진 국회의원의 장남으로 본래 유도인이었다. 서씨가 쉽게 합기도에 입문하게 된 것은 유도와 합기도가 모두 대동류합기유술에서 파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51년에 장승호·서병돈 등 2명이 입문한다. 이들이 서씨를 비롯하여 합기도의 1세대인 대원로이다. 55년에 문종원·김무홍·지한재 등 3명이 합기도에 입문한다. 1956년 강문진, 1957년 신상철 등이 입문하게 된다. 이들이 합기도의 2세대가 된다.

서복섭은 51년 한국 최초의 합기도장인 ‘대한합기유권술 도장’이라는 간판을 예의 양조장 2층에 걸게 된다. 1958년 한국합기도가 안동에서 지한재의 ‘성무관(聖武館)’과 대구에서 김무홍의 ‘신무관(新武館)’, 부산에서 도주 직계인 문종원이 ‘합기 경남지관(元武館)’을 각각 개관하면서 본격적으로 관(館) 중심의 가지치기를 한다.

김무홍의 신무관에 김정수·이민영·원광화·김무정·하인호·정환 등이 입문하게 되고, 지한재의 성무관에 유영우·송주원·황덕규·이태준·강정수·김용진·명재남 등이 입문하고, 도주직계 도장인 수덕관(修德館)에는 문종원·강문진·신상철·송중회·김정윤·서인혁·김영재 등이 입문하게 된다. 그 후 1959년 지한재의 성무관은 안동에서, 1960년 김무홍의 신무관은 대구에서 도장을 각각 서울로 이전하게 되면서 드디어 서울 중심이 된다.

대동류유술(柔術)은 일본 사무라이 무술의 기둥으로서 당시 일본무술계의 대표적인 유파이다. 대동류유술은 도합 270여 가지에 이르는데, 이를 최용술이 국내에 처음 들여왔을 때는 ‘야와라(柔術)’라고 불렀다. 한편 일본에서는 유술을 근간으로 하여 근대에 와서 걸어 던지고 메치는 기술을 중심으로 경기화시켜 유도(柔道)로 발전시켰다. 아울러 유술을 근간으로 하여 유도의 던지고 메치는 기술과 달리 손목, 팔굽, 어깨 등 관절을 제압하면서 상대공격을 흘려내는 기술이 일본에서 아이키도(合氣道)로 발전한다.

합기도는 어디까지나 ‘선방어(先防禦), 후공격(後攻擊)’ 무술이다. 따라서 내 힘을 적게 들이고 상대를 제압하는 상승의 무술이다. 일본의 아이키도와 한국의 합기도가 다른 점은 아이키도가 흐름의 ‘유(流)’와 돌리는 ‘원(圓)’의 기술을 중시하여 돌려서 아프게 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 반면, 한국 합기도의 주된 원리인 ‘화(和)’는 화합, 일치(一致)하는 것을 중시하여 관절꺾기를 위주로 바로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합기도는 ‘원(圓)의 무술’이다. 따라서 화원류(和圓流) 모두에 능해야 한다. 합기란 단전(丹田)을 중심으로 몸의 상체와 하체가 하나가 되어 힘과 기량이 구사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의 권능이 발휘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가 단전을 중심으로 모이고 몸의 사지로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가는 것이다.

합기(合氣)란 천기(天氣)와 지기(地氣)를 인체에서 조화롭게 한다는 무술이다. 즉, 천지인 합일을 추구하는 무술인 셈이다. 본래 하늘의 기는 호흡으로 얻고, 땅의 기는 음식물을 통해서 흡수하는 것인데 이것을 무술을 통해 달성하는 것이 합기도이다. 결국 합기도도 기공을 이용하는 무술의 한 종류이다. 합기도의 관절기는 특히 손의 합곡혈(合谷穴), 팔꿈치의 곡지혈(曲池穴), 어깨의 견정혈(肩井穴)을 주로 노린다. 기가 모이는 이곳에 타격을 주면 엄청난 충격이 된다.

합기도도 변하게 마련이다. 처음엔 최용술의 시기에는 관절기(關節技)를 특기로 했다. 그러나 뒤에 화려한 발차기와 강력한 주먹 지르기 등 타격기(打擊技)가 보태진다. 발기술은 김무홍씨에 의해 고안되었다. 당시 태권도와 교류하면서 상대적으로 리치가 짧은 발차기를 보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소룡의 유작 ‘사망유희’에 출연했던 지한재 선생이 발차기의 틀을 마련했다. 현재 합기도 발차기의 트레이드 마크인 고공 발차기와 회축(回軸)이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김정수 선생은 보통 서너명의 제자들을 상대해도 쉽게 처리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
합기도의 고향인 대구에서 합기도를 지키고 있는 ‘합기도 지킴이’ 김정수(金正守) 선생을 만났다. 그는 현재 경일대학 경찰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때 사업가로도 큰 성공을 거둔 김 선생은 사재를 털어 합기도의 물주를 자원하기도 했다. ‘타격기의 달인’, ‘영남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진 김 선생은 지금도 단단한 풍채와 무예인으로서의 예기(銳氣)를 풍기고 있었다. 조금도 빈틈이 없어보였다. 현재 세계합기도총연맹 총재도 맡고 있는 김 선생은 김무홍 계열로 합기도 3세대가 되는 ‘살아있는 합기도의 역사’이다. 1970년대 초에 김 선생은 이미 맥주병 다섯 개를 쌓아놓고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주먹으로 깨뜨리는 기술을 보였다. 그는 ‘1초 8방타’로 유명세를 탔다. 일지(一指), 이지권(二指拳)으로 기왓장 두세 장을 격파하는 손가락 공력을 자랑했다. 타격기술만큼은 독보적인 존재였다.

“권법(拳法)은 내가 만들었지요.”

원래 중국 무술과 공수도에 관심이 많았던 김 선생은 단조롭고 파괴적인 주먹을 사용하는 형의권과 소림권 등에서 착안하여 숱한 공방동작을 만들어냈다.

그는 79년 11월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특별한 지원에 힘입어 당시 기도회(총재 김두영), 한국합기도협회(총재 김무홍), 합기회(총재 명재남) 등으로 흩어져 있는 합기도인을 기존의 ‘대한민국합기도협회’(총재 최대훈)를 중심으로 통폐합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당시 통폐합과 더불어 김우중 회장이 총재로 취임하면서 합기도는 탄생 후 최대의 발전의 기회를 맞게 된다. 당시 대우빌딩에 80여평의 도장을 마련했다. 그러나 대한민국합기도협회는 다시 분열하고 마는데 동 협회를 유지만 했더라도 태권도보다 먼저 통합된 합기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신장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때의 아쉬움으로 김정수 선생은 현재 세계합기도총연맹을 이끌고 있다.

그는 1970년 6월 22일에서 9월 22일 사이, 오사카만국박람회(세계 96개국 참가)가 열리는 세 달 동안 일본에 한국의 합기도를 소개하는 교류행사를 벌여 일본의 NHK를 비롯한 여러 방송에 알림으로써 국위를 선양하는 성과를 얻었다. 그는 또 70년에 대통령령으로 허가제로 되어 중구남발이 된 단증수여제도를 대한민국합기도협회에서 발행하는 단증으로 통일하는 합의를 이루어냄으로써 합기도 단증을 한 단계 격상시켰다. 지난 74년 4월10일 대구 아시아극장에서 ‘제1회 전국합기도시범대회’를 개최하여 현재 15회째를 맞고 있다.

“유럽에는 현재 90여개의 한국 합기도 도장이 산재해 있습니다. 미국에도 3개의 협회가 있습니다. 전통적 본격적인 무예보다 호신술로서 무예가 재평가되고 있는 가운데 합기도는 어느 무예보다 본래 호신술에 가장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까닭에 앞으로 무궁한 발전이 기대됩니다.”

그는 또 호신술, 건강, 체육화의 길을 무예계가 외면할 수 없는 이때에, 합기도와 태권도의 협조와 상호발전도 도모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야 한국이 태권도에서 쌓아온 세계적 지도력과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예와 체육에서 세계를 계속해서 선도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는 호신술에 취약한 태권도가 세계적 대세에 밀리면서 해외태권도 도장이 태권도 한 종목만으로 도장운영을 하기에 힘겹다는 소리와 함께 합기도를 동시에 가르칠 것을 제안해오는 도장이 많기 때문이다. 합기도와 태권도의 상호협조는 바로 한국 무술계의 대표적인 두 브랜드가 상생하면서 시너지효과를 거두는 첩경이 될 것으로 보인다. 태권도가 아버지라면, 합기도는 어머니인 셈이다.

그러나 현재 국내에는 20여개의 합기도 단체가 난립해 있다. 대한기도회, 대한합기도협회, 국제연맹합기회, 세계합기도총연맹 등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고 하지만 다시 한 번 심기일전의 대통합을 시대적 과제로 남겨두고 있다. 태권도의 발전이 관 중심의 운영에서 탈피하여 대한태권도협회 하나로 통합하면서 발전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밖에서 힘을 펼칠 수가 있는 것이다.

“생전에 제 소망은 합기도가 ‘국기(國技) 합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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