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중재사건이 크게 늘면서 이를 유치하려는 각국 중재기관의 경쟁도 날로 치열해졌다. 중재는 부가가치 창출이 높은 서비스산업으로서 법률시장과 공증, 통·번역업, 숙박업 등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크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도 지리적 위치, 법률체계, 중재전문가 자질 등 여러 면에서 아시아권 ‘중재 허브’가 될 여건을 갖춘 만큼 종합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아시아권 ‘중재 허브’ 경쟁 치열
중재기관은 대체로 비영리 민간기구로 각국에 세워져 있다. 대한상사중재원(KCAB), 프랑스 파리의 국제상업회의소(ICC) 국제중재법원, 영국의 국제중재법원(LCIA), 미국중재인협회(AAA), 싱가포르국제중재센터(SIAC), 홍콩국제중재센터(HKIAC) 등이다. 투자중재를 전문으로 다루는 세계은행 국제투자분쟁센터(ICSID)와 ICC, AAA, LCIA가 국제중재를 주도하고 있다.
아시아권에서는 1985년 경제단체와 홍콩 정부에 의해 비영리 기관으로 세워진 HKIAC가 금융중심지이자 영어권 문화를 앞세워 중재시장을 주도했다. 하지만 1997년 홍콩 주권 중국 반환 이후 위상이 흔들리는 틈을 타 경쟁관계인 싱가포르가 급부상했다는 평이다.
싱가포르는 2년 전 정부 소유 대규모 빌딩을 ‘맥스웰 챔버스’로 리모델링해 중재심리실 14개, 회의실 12개를 갖춰 SIAC를 입주시키고 외국 중재기관 사무소를 유치했다. 빌딩에는 로펌 2곳과 통·번역사무소, 공증사무소 등이 들어서 있어 ‘원스톱 중재 서비스’가 가능하다.
이에 자극받은 홍콩도 지난 5월 SIAC가 입주한 정부 빌딩 내 공간을 2배로 늘리는 한편 1억홍콩달러(약 150억원)의 기금을 출연해 해외 IR와 홍보 활동 강화에 나섰다. 12월8일에는 웡옌렁 홍콩 법무장관이 SIAC 프로모션 차원에서 한국을 찾을 예정이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지역중재센터(KLRAC)도 최근 250억원을 들여 빌딩을 리모델링하고 경쟁에 가세했다.
◆한국, ‘중재 허브’ 여건 두루 갖춰
국내 법률사무소의 국제중재 대응 능력은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0여년 전부터 태평양의 김갑유, 김앤장의 윤병철 변호사 등이 중재시장에 주목해 국제중재 경험과 노하우를 익히고 공유한 덕이다. 현재 웬만한 로펌은 국제중재팀을 모두 갖추고 있다.
박노형 고려대 교수는 “국제중재를 영미권 출신 법률가들이 독식했는데, 이 폐쇄적인 집단에 최근 우리 중견 변호사들이 대거 진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갑유 변호사는 지난해부터 국제중재의 최고 권위기관인 유엔 산하 국제상사중재위원회(ICCA)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그는 ICC, LCIA, AAA 중재기구 상임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윤 변호사는 ICSID 중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SIAC 등 여러 기관의 중재인으로도 등재돼 있다.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세계 무역 대국 2, 3위인 중국과 일본의 중간지대인 데다 대륙법을 기본으로 영미법을 가미한 법률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영어권 문화를 장점으로 내세우는 홍콩과 싱가포르, 호주 등이 영미법 체계를 따르는 반면에 아시아권 중재 서비스의 주요 수요자인 중국과 일본, 한국, 인도네시아 등은 모두 대륙법 체계에 속하는 나라들이다.
◆KCAB의 국내외 위상 제고해야
국가의 중재 경쟁력이 강해야 우리 기업이 세계 중재기관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사례가 줄어든다. 국가의 중재 경쟁력은 중재기관, 중재전문변호사, 법원 전문성, 신속한 절차에 따라 결정된다. 다른 여건에 비해 국내 유일의 중재기관인 KCAB의 국내외 위상은 아쉽기만 하다. KCAB가 지식경제부 산하기관인 데다 비법률가가 원장을 맡는 등 공정성에 의구심을 살 만한 상황을 자초한 측면이 크다. 정부 지원은 연간 7억∼11억원으로 운영비에도 턱없이 모자란다.
중재기관을 새로 만들자는 목소리도 있지만 전문가들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것보다 국가 차원에서 KCAB 지원을 확대하되 독립성을 확보하고 공정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해외 유명 중재전문가들을 초청해 그들에게 KCAB의 중재 규칙을 손질하도록 하고 이사회나 중재인에 참여시키는 한편 해외 프로모션도 강화해야 한다.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중재 전문인력 양성도 시급한 과제다.
박희준·조현일 기자 july1s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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