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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선의 중국기행] 시간의 풍경을 찾아서 ⑥ 황하, 문명의 태반·재앙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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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2-08 21:23:15 수정 : 2012-02-08 21: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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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명 낳고 키운 영원한 ‘어머니의 강’
땅 비옥해 농업 발달…인구 집중
고대국가들 찬란한 문화 꽃피워
중국인들은 황하를 무친허(母親河), 어머니의 강이라고 부른다. 세계 4대 문명의 하나로 기록된 위대한 중국문명을 낳은 강이 바로 황하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황하는 우리가 중원(中原)이라고 부르는 광대한 평원에 생명수를 공급하며 아득한 옛날에 이 지역을 한족문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황하의 중·하류에 해당하는 중원은 남송시대 이전까지는 중국에서 농업생산이 가장 발전한 지역이었으며 인구의 대다수가 거주하는 곳이었다. 하(夏), 은(殷), 주(周), 진(秦), 한(漢), 수(隋), 당(唐), 북송(北宋) 등 찬란한 문화를 건설한 수많은 고대국가들이 황하 연변에 수도를 정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황하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강인 동시에 끔찍한 아버지의 강이기도 했다. 황하의 물줄기는 난폭한 황룡처럼 그 몸통을 자주 꿈틀거리면서 상류와 하류에 사는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상류에 해당하는 오르도스(鄂爾多斯) 지역에서 겨울에 자주 발생하는 홍수와 하류에 해당하는 카이펑(開封) 일대에서 여름에 발생하는 홍수는 황하가 흐르고 있는 한 피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황하가 가져오는 재앙은 유역의 황토층과 중·하류의 지형, 크게 굽이치는 물길이 만든 일종의 숙명이었다. 황하는 중국인들에게 문명의 태반인 동시에 재앙의 근원이었다.

필자에게 황하는 그냥 땅 위를 흐르는 큰 강이었다. 어린 시절 필자가 처음 배운 천자문의 첫 네 글자는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를황이었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는 것이 그 뜻이었다. 그러니까 황하는 땅위를 흐르는 강이었다. 필자의 고향에서 땅위를 흐르는 물은 도랑물도 시냇물도 강물도 모두 누런 색깔이었다. 중국이라고 무엇이 다르겠는가! 황하는 단지 중국의 대지 위를 흐르는 큰 강일 따름이라고 필자는 생각했다. 어느 정도 자라서 황하의 강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부질없는 기다림이라는 뜻의 백년하청(百年河淸)이란 말을 알았을 때도 그저 어느 나라에나 있는 다소간의 과장이겠거니 했다. 황해(黃海)라는 바다 이름은 황하가 바다를 혼탁하게 하였기 때문이란 이야기를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황하 모친상. 란저우(蘭州) 시내를 지나는 황하 강변에 세운 조각상. 황하를 어머니로 표현하여 모친상을 만들었다.
필자가 황하에 대해 가졌던 추상적 관념을 처음 제대로 수정해 준 것은 일본 공영방송 NHK가 1986년에 방영한 대작 다큐멘터리 ‘대황하(Great Yellow River)’였다. ‘대황하’는 황토의 협곡과 대지를 사납게 혹은 부드럽게 흐르는 물길을 따라가면서 광대한 중국대륙의 웅장하고 아름다우면서도 험악하고 난폭한 자연환경과, 거기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의 고달픈 모습을 빼어난 영상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더구나 영상과 함께하는 배경음악의 길고 느린 특이한 색조가 황하의 숙명적 이미지와 절묘하게 어울리면서 필자를 화면 속으로 끌어들였다. 보는 사람 자신이 황하의 풍경 속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그 음악소리를 들으며 필자는 중국여행이 자유로워진다면 황하에 가보아야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그 배경음악이 ‘소지로’라는 일본 음악가가 직접 흙으로 구워 만든 오카리나라는 자연의 악기로 황하의 기나긴 흐름을 표현한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황하 삼문협(三門峽) 댐. 허난(河南)성에 있는 삼문협(三門峽) 댐은 황하 제1댐이라고 한다.
필자가 황하를 처음 본 것은 하류인 산둥(山東)성 지난(濟南)에서였다. 지난에서 만난 황하는 필자가 가졌던 큰 강이란 이미지와는 달리 너무나 초라했다. 지난을 흐르는 황하는 강물이 아니라 겨우겨우 힘겹게 흘러가는 냇물에 지나지 않았다.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길이를 자랑하는 대황하가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이백이 유명한 ‘장진주(將進酒)’란 시에서 호쾌하게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황하가 하늘에서 흘러와/ 바다에 이르러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君不見/黃河之水天上來/奔流到海不復回)”이라고 썼던 그 황하가 강물이란 이름만 초라하게 유지하며 흐르는 모습을 필자는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하늘에서 시작하는 황하가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필자는 그보다 좀 더 상류인 정저우(鄭州)와 삼문협(三門峽) 댐 근처에서 다시 황하를 찾았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황하는 마찬가지로 실망스러웠다. 필자가 칭하이(靑海)성의 구이더(貴德) 일대에서, 간쑤(甘肅)성의 란저우(蘭州) 일대에서, 닝샤후이족자치주(寧夏回族自治州)의 인촨(銀川) 일대에서, 산시(陝西)성과 산시(山西)성 사이의 호구폭포(壺口瀑布)에서 다시 황하를 찾아 나섰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구이더(貴德) 황하. 칭하이(靑海)성 구이더를 흐르는 황하는 푸른 색이다.
황하는 칭하이성의 청장고원(靑藏高原)에 있는 바옌카라산(巴顔喀拉山) 북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5464㎞의 대장정을 거쳐 발해만(渤海灣)으로 흘러들어가는 강이다. 황하는 칭하이성에서는 어느 정도 푸른 색을 유지하지만 구이더를 지나 간쑤성에 가까워지면서부터 흐려지기 시작한다. 동으로 흐르던 황하는 란저우를 지나 황토 고원 지대를 북으로 치달아 올라 크게 디귿을 그리면서 오르도스 지역의 정점에 도달하는 동안에 혼탁해질 대로 혼탁해진 황하는 그 후 방향을 틀어 산시(陝西)성과 산시(山西)성의 경계를 이루며 수직으로 남하한다. 그리고 퉁관(潼關)까지 남하한 황하는 서 관중지방(關中地方)에서 흘러온 위하(渭河), 경하(涇河), 낙하(洛河)와 합류하여 중원지역을 관통하며 동으로 흐른다.

이렇게 미세한 황토먼지를 잔뜩 머금은 채, 다시 말해 걸쭉한 진흙물로 흘러가는 황하는 상류에서는 겨울 홍수를 하류에서는 여름 홍수를 숙명처럼 안고 있었다. 상류인 란저우지역에서 황하는 북쪽으로 수백 킬로미터를 북상하기 때문에 겨울이 오면 북쪽에 있는 하류가 상류보다 먼저 얼어붙는다. 그리고 봄이 올 때는 상류가 하류보다 먼저 녹기 시작한다. 따라서 상류에서 녹아 떠내려 온 얼음덩이들이 얼어 있는 북쪽 하류에 막혀 쌓이면서 오르도스 일대에서는 겨울 홍수가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을 중국 사람들은 얼음덩이가 갑자기 덮친다고 해서 능신(凌迅)이라 불렀다.

상류지역의 재앙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황하는 강물이 흐르는 동안은 농경민족인 남쪽의 한족과 유목민족인 북쪽의 이민족 사이를 구분 짓는 자연의 경계를 이루면서 만리장성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이민족 기마부대의 습격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어떤 기마부대도 온통 진흙투성이인 황하를 여름에 건널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겨울이 오면 사정은 달라진다. 겨울이 와서 강물이 두껍게 얼고 그 위에 황토먼지가 두텁게 쌓이면 오르도스 지역의 황하는 완전히 기마부대가 자유롭게 진격할 수 있는 육지로 변한다. 오르도스 지역이 유목민족 기마부대가 중국을 침공하는 단골 루트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흉노족, 돌궐족, 몽고족 모두 이곳을 통해 중국으로 진격했다. 일찍이 진나라가 수도인 셴양(咸陽)에서 오르도스의 북쪽 끝에 이르는 ‘직도(直道)’라 부르는 직선도로를 만들어 유목민족의 침공에 신속히 대처하려 한 것을 보면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산둥(山東)성 일대 황하 하류의 모습. 황하는 산둥성 둥잉(東營)에서 발해로 들어간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 때 상류지역의 이 같은 재앙은 하류지역의 경악할만한 재앙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鳥足之血)에 지나지 않는다. 황하가 뤄양(洛陽)을 지나 발해만에 이르는 동안은, 다시 말해 중원지역을 통과하는 동안은 상류와 하류의 표고차가 거의 없다. 그래서 중류지역에서 1㎥당 44㎏에 달하는 황토먼지를 잔뜩 머금은 황하는 동으로 느리게 흐르면서 강바닥에 다량의 황토먼지를 퇴적시켜서 황하를 사람의 힘으로 제어하기 어려운 천정천으로 만들어 놓았다. 전설시대에 속하는 요순우탕(堯舜禹湯) 시대로부터 청왕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황제들이 직면한 가장 골치 아픈 문제가 하류의 치수(治水)였다는 것이 이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중·하류에 큰 비가 내리게 되면 먼지를 잔뜩 머금어 걸쭉해진 황하는 제어할 수 없는 야생마처럼, 중국 측의 표현을 빌리면 ‘수만 마리의 말들이 일제히 내달리듯이’ 둑을 무너뜨리고 중원지방을 휩쓸어 버린다.

이런 연유로 해서 중국에는 옛날부터 황하를 다스리는 사람이 천하를 지배한다는 말이 생겨났지만 매년 퇴적되는 황토를 막을 수는 없었다. 북송의 수도였던 카이펑을 땅속 깊이 묻어버린 대홍수를 비롯한 크고 작은 홍수가 제방을 무너트리면서, 그리고 남진하는 외적 유목민족을 막기 위해 인위적으로 제방을 파괴하면서 황하는 하류 일대를 휩쓸었을 뿐만 아니라 하도(河道)마저 10여 차례나 바꾸었다. 태산의 이북인 톈진(天津)으로 흐르던 황하가 태산 아래인 회하(淮河)로 흐르는 일이 벌어졌으며 그 사이로 바뀐 회수도 무수히 많다. 가장 최근의 경우만 해도 중일전쟁 중인 1938년에는 일본군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이 제방을 폭파하여 물길을 바꾸는 바람에 수십만 명의 무고한 사람이 죽었다. 

병령사(炳靈寺) 일대의 황하. 병령사는 간쑤(甘肅) 링샤(臨夏)에 있다. 이 지대의 황하는 댐에 고인 물이어서 맑고 푸르다.
황하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난폭한 성격을 제어하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은 유가협(劉家峽) 댐, 삼문협 댐 등 대규모 댐을 건설했다. 20세기 후반에 빠르게 진행된 황하 주변의 농지개척과 수천 년간 이루어진 삼림남벌, 기후변화에 따른 강수량의 감소, 그리고 농공업용수 획득과 홍수조절을 위한 댐 건설로 인해 최근 70년 동안 홍수 피해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이로 말미암아 새로운 재앙이 시작되었다. 상류와 중류에서 대량의 물을 빼돌리는 바람에 하류의 강물이 없어졌으며 이에 따라 지난 일대에서는 지하수가 고갈되기 시작한 것이다. 인구 밀집 지역인 중원지역이 점차 건조해지기 시작하고 있는 이러한 변화는 인간이 자연을 제어하고 지배하는 일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황하는 중국문명의 젖줄이었으며 황하의 흐름은 꿈틀거리는 황룡의 이미지로 중국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정저우와 지난에서 본 시냇물 같은 황하는 야생의 황룡을 순치시킨 것이 아니라 거의 죽여버린 것처럼 보였다. 이제 황하를 다스린다는 것은 과거와는 달리 홍수를 막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풍부한 수량으로 부드럽게 흘러가도록 만드는 데 있다는 생각을 필자는 떨쳐버릴 수 없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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