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비옥해 농업 발달…인구 집중
고대국가들 찬란한 문화 꽃피워
중국인들은 황하를 무친허(母親河), 어머니의 강이라고 부른다. 세계 4대 문명의 하나로 기록된 위대한 중국문명을 낳은 강이 바로 황하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황하는 우리가 중원(中原)이라고 부르는 광대한 평원에 생명수를 공급하며 아득한 옛날에 이 지역을 한족문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황하의 중·하류에 해당하는 중원은 남송시대 이전까지는 중국에서 농업생산이 가장 발전한 지역이었으며 인구의 대다수가 거주하는 곳이었다. 하(夏), 은(殷), 주(周), 진(秦), 한(漢), 수(隋), 당(唐), 북송(北宋) 등 찬란한 문화를 건설한 수많은 고대국가들이 황하 연변에 수도를 정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황하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강인 동시에 끔찍한 아버지의 강이기도 했다. 황하의 물줄기는 난폭한 황룡처럼 그 몸통을 자주 꿈틀거리면서 상류와 하류에 사는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상류에 해당하는 오르도스(鄂爾多斯) 지역에서 겨울에 자주 발생하는 홍수와 하류에 해당하는 카이펑(開封) 일대에서 여름에 발생하는 홍수는 황하가 흐르고 있는 한 피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황하가 가져오는 재앙은 유역의 황토층과 중·하류의 지형, 크게 굽이치는 물길이 만든 일종의 숙명이었다. 황하는 중국인들에게 문명의 태반인 동시에 재앙의 근원이었다.
필자에게 황하는 그냥 땅 위를 흐르는 큰 강이었다. 어린 시절 필자가 처음 배운 천자문의 첫 네 글자는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를황이었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는 것이 그 뜻이었다. 그러니까 황하는 땅위를 흐르는 강이었다. 필자의 고향에서 땅위를 흐르는 물은 도랑물도 시냇물도 강물도 모두 누런 색깔이었다. 중국이라고 무엇이 다르겠는가! 황하는 단지 중국의 대지 위를 흐르는 큰 강일 따름이라고 필자는 생각했다. 어느 정도 자라서 황하의 강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부질없는 기다림이라는 뜻의 백년하청(百年河淸)이란 말을 알았을 때도 그저 어느 나라에나 있는 다소간의 과장이겠거니 했다. 황해(黃海)라는 바다 이름은 황하가 바다를 혼탁하게 하였기 때문이란 이야기를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황하 모친상. 란저우(蘭州) 시내를 지나는 황하 강변에 세운 조각상. 황하를 어머니로 표현하여 모친상을 만들었다. |
황하 삼문협(三門峽) 댐. 허난(河南)성에 있는 삼문협(三門峽) 댐은 황하 제1댐이라고 한다. |
구이더(貴德) 황하. 칭하이(靑海)성 구이더를 흐르는 황하는 푸른 색이다. |
이렇게 미세한 황토먼지를 잔뜩 머금은 채, 다시 말해 걸쭉한 진흙물로 흘러가는 황하는 상류에서는 겨울 홍수를 하류에서는 여름 홍수를 숙명처럼 안고 있었다. 상류인 란저우지역에서 황하는 북쪽으로 수백 킬로미터를 북상하기 때문에 겨울이 오면 북쪽에 있는 하류가 상류보다 먼저 얼어붙는다. 그리고 봄이 올 때는 상류가 하류보다 먼저 녹기 시작한다. 따라서 상류에서 녹아 떠내려 온 얼음덩이들이 얼어 있는 북쪽 하류에 막혀 쌓이면서 오르도스 일대에서는 겨울 홍수가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을 중국 사람들은 얼음덩이가 갑자기 덮친다고 해서 능신(凌迅)이라 불렀다.
상류지역의 재앙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황하는 강물이 흐르는 동안은 농경민족인 남쪽의 한족과 유목민족인 북쪽의 이민족 사이를 구분 짓는 자연의 경계를 이루면서 만리장성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이민족 기마부대의 습격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어떤 기마부대도 온통 진흙투성이인 황하를 여름에 건널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겨울이 오면 사정은 달라진다. 겨울이 와서 강물이 두껍게 얼고 그 위에 황토먼지가 두텁게 쌓이면 오르도스 지역의 황하는 완전히 기마부대가 자유롭게 진격할 수 있는 육지로 변한다. 오르도스 지역이 유목민족 기마부대가 중국을 침공하는 단골 루트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흉노족, 돌궐족, 몽고족 모두 이곳을 통해 중국으로 진격했다. 일찍이 진나라가 수도인 셴양(咸陽)에서 오르도스의 북쪽 끝에 이르는 ‘직도(直道)’라 부르는 직선도로를 만들어 유목민족의 침공에 신속히 대처하려 한 것을 보면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산둥(山東)성 일대 황하 하류의 모습. 황하는 산둥성 둥잉(東營)에서 발해로 들어간다. |
이런 연유로 해서 중국에는 옛날부터 황하를 다스리는 사람이 천하를 지배한다는 말이 생겨났지만 매년 퇴적되는 황토를 막을 수는 없었다. 북송의 수도였던 카이펑을 땅속 깊이 묻어버린 대홍수를 비롯한 크고 작은 홍수가 제방을 무너트리면서, 그리고 남진하는 외적 유목민족을 막기 위해 인위적으로 제방을 파괴하면서 황하는 하류 일대를 휩쓸었을 뿐만 아니라 하도(河道)마저 10여 차례나 바꾸었다. 태산의 이북인 톈진(天津)으로 흐르던 황하가 태산 아래인 회하(淮河)로 흐르는 일이 벌어졌으며 그 사이로 바뀐 회수도 무수히 많다. 가장 최근의 경우만 해도 중일전쟁 중인 1938년에는 일본군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이 제방을 폭파하여 물길을 바꾸는 바람에 수십만 명의 무고한 사람이 죽었다.
병령사(炳靈寺) 일대의 황하. 병령사는 간쑤(甘肅) 링샤(臨夏)에 있다. 이 지대의 황하는 댐에 고인 물이어서 맑고 푸르다. |
황하는 중국문명의 젖줄이었으며 황하의 흐름은 꿈틀거리는 황룡의 이미지로 중국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정저우와 지난에서 본 시냇물 같은 황하는 야생의 황룡을 순치시킨 것이 아니라 거의 죽여버린 것처럼 보였다. 이제 황하를 다스린다는 것은 과거와는 달리 홍수를 막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풍부한 수량으로 부드럽게 흘러가도록 만드는 데 있다는 생각을 필자는 떨쳐버릴 수 없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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