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약자 서비스엔 소홀 지체장애 1급 박모(26·여)씨에게 은행 현금자동입출금기(ATM)는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골목길과 아스팔트 도로의 숱한 장애물을 통과하면 마지막 관문이 그를 기다린다. 은행 점포의 ATM에 도착한 그는 호흡을 가다듬는다. 현금 인출을 위해 있는 힘껏 팔을 뻗어 버튼을 누른다. 누르는 데까진 간신히 성공했지만 그 다음이 난제다. 휠체어 높이에선 화면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박씨는 “은행 출입구에 경사로가 없어 접근조차 불가능한 곳도 많다”면서 “금융기관들이 장애인 편의에 조금만 더 신경을 써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박씨처럼 은행 이용에 어려움을 겪는 장애인들은 한둘이 아니다. 금융회사들이 장애인 고객의 서비스에 소홀한 탓이다.
3일 서울 구로구 오류동의 은행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앞에서 휠체어를 탄 한 장애인이 카드를 넣기 위해 팔을 힘껏 뻗고 있으나 투입구 위치가 높아 애를 먹고 있다. 이재문 기자 |
한국은행과 17개 은행으로 이뤄진 ‘금융정보화추진위원회’는 지난해 10월 말 휠체어 사용자를 위해 ATM 설치 표준안을 만들고 부스 크기, 기계 조작부 높이를 표준화했다. 그 후 7개월여의 시간이 흘렀으나 눈에 띄는 결과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기자가 직접 서울 도심인 을지로 일대 시중은행 점포 10곳을 점검한 결과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이용 가능한 ATM으로 바꾼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자체 실태조사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무관심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신규 점포나 리모델링 점포는 교체하려고 애를 쓰지만 기존에 설치된 기기를 뜯어내고 설치하기란 사실상 어렵다”며 고개를 저었다.
은행들의 장애인 편의 외면은 이뿐이 아니다. 지난해 11월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전국 10개 은행 점포 조사에서 시각장애인용 점자자료가 갖춰진 곳은 전체의 14%, 청각장애인용 수화통역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은 4%에 그쳤다.
현행법상 은행은 장애인에게 차별 없는 금융서비스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 정부가 2008년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내년 4월까지 이를 시행토록 제도화했지만 금융권은 별 관심이 없다.
한국척수장애인협회 관계자는 “은행들이 돈놀이로 사상 최대의 수익을 올리면서도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 편의와 배려엔 소홀히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지난해 은행들의 당기순이익은 12조원을 기록, 전년보다 29%나 늘었다.
서울 장애인 자립생활센터 박찬오 소장은 “장애인이 이용하기 편리한 시설은 비장애인도 수월하게 이용할 수 있다”면서 “은행들이 비용만 내세우며 장애인 편의를 외면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김유나 기자 y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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