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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깨달음을 주는 사람] 천주교 작은형제수도원 오수록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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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9-17 19:23:00 수정 : 2013-11-26 18: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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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타적인 종교는 스스로 섬에 갇혀"
“가톨릭 수도사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며, 무소유의 삶을 살고 있지요.” 서울 종로구 평창동 주택가 골목에 자리 잡은 천주교 ‘작은 형제 수도원’. 이곳에서 오수록 수사(54)는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기초 수도자들을 지도하며, (종교간) 대화위원회 책임을 맡고 있는 그는 언뜻 산중의 스님을 연상케 했다. 평소 그대로의 낡은 셔츠 차림으로 손님을 맞는 거며, 삭발만 하지 않았을 뿐 맨바닥에 앉아 차를 우려내는 스타일도 선승을 닮았다.


“미사나 행사 때 외에는 수도복을 입지 않아 일반인과 분간이 잘 안 가지요. ‘남자수녀’라고 하면 금방 알아들어요.”

서울에는 5개의 수도원이 있는데, 오 수사가 몸담고 있는 평창동 작은 형제 수도원은 수사가 되기를 청원한 청원자(불교의 행자격)들이 기초교육을 받는 청원소다. 현재 청원자 10명과 이들을 지도하는 수사 5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작은 형제 수도원은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 성프란치스코(1182-1226)가 세웠는데, 극도의 청빈한 삶으로 유명하다. 오수사는 수도원의 기원을 들려줬다.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무역상의 아들로 태어났죠. 젊은 시절 부유하고 호방한 삶을 살았으나 회심 이후 예수처럼 고난을 길을 걷기로 작정합니다. 1209년 그를 따르는 동료들과 수도회를 세우려 했을 때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회칙이 너무 엄격해 처음에는 거절했다고 합니다. 초기 수도회는 거처도 가지지 않았고, 남의 집 처마 밑이나 들판에서 잠잤으며, 겨울에는 굴뚝을 껴안고 자기도 했어요. 밥도 동냥을 해서 나환자 등 당시 버림받고 소외된 이들과 나눠 먹으며 철저히 그들의 아픔을 보듬어주었습니다. 한국에는 1937년에 들어왔어요. 지금은 거처를 가지게 되었지만, 후원자들의 기금으로 생활하니, 탁발 전통은 여전히 이어지는 셈입니다. 수도회에서는 모두 ‘형제’라고 부르지요. 성프란치스코는 날짐승, 길짐승까지도 형제로 여겼습니다.”

오 수사가 닮고자 하는 역할 모델도 성프란치스코다. 세상 물정 모르고 사는 그에게 동료들이 오 수사의 이름과 발음이 비슷한 ‘어수록’이라고 별명을 지어줬다. 정호승의 시 ‘평창동 수도원’에도 오 수사가 등장한다. “평창동 수도원에는 어수룩한 수사들만 산다/그들은 너무 어수룩해서 자기들이 어수룩한 줄도 모른다/산새들이 가끔 어수록 어수룩하고 지저귀며 놀려 대어도/그들은 그냥 산을 보고 웃을 뿐이다…이 세상 사람들이 다 똑똑한 것은 평창동 수도원에 사는 어수룩한 수사들 때문이다.”

그는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터득한 게 있다. ‘삼밭에 쑥대’라는 말도 있듯이. 쑥이 삼밭에 섞여 자라면 삼대처럼 곧아지는 것처럼, 좋은 사람들 곁에서 함께 생활하면 자기 역량이 더 발휘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공동체의 은사라고 생각했다.

오수록 수사는 자기에게 굳건한 신앙이 있으면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용의 정신이 나온다고 말한다.
본래 유교 집안에서 태어난 오 수사는 서원(書院)에서 공부한 마지막 세대다. 유학자가 꿈이었으나 부친이 49세에 위암으로 세상을 뜨면서 처음으로 인생문제와 대면했다. 그 후 명사들을 찾아다니다 우연한 기회에 가톨릭 교리를 6개월간 배우게 됐다. 그러나 예수의 이적기사를 보고 기독교에 절망했다. 그 길은 너무 높고 위대해 자기가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던 것. 그러던 중 신교와 구교를 초월한 성서강독에 참석했다가 힘없고, 나약한 인간 예수를 발견하고 다시 성서로 돌아와 한동안 개신교에 다니기도 했다.

“둘 다 좋았지만, 제 정서상 가톨릭이 맞았던 것 같아요.”

그의 삶에 결정적인 변화를 준 것은 두 권의 책,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과 ‘성프란치스코의 전기’였다. ‘생활의 발견’에서 “산에서 금욕고행하는 것보다 저잣거리에서 금욕고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대목을 읽고 가슴이 뜨거웠는데, ‘누더기 성자’ 성프란치스코의 삶이 임어당이 제시한 수도자상과 정확히 일치해 희열을 느꼈다. 이때 세상의 모든 의심이 풀리면서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부닥치며 사는 수사의 길을 택하게 됐다. 그는 동서양을 넘나드는 학문을 한 탓인지 타종교에서도 배울 것을 많이 찾는다.

오 수사는 “종교에 순혈주의는 없다”고 못 박았다. 문화가 만나 서로 알게 모르게 동화돼 나온다는 것. 산신각이나 칠성각을 모신 사찰에서 한국의 민간신앙을 접목한 불교의 통 큰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중국에서는 불교와 도가(道家)가 만나 선종(禪宗)과 같은 진보된 사상이 나왔다는 것이다.

“지금은 다원주의 종교시대로, 다른 종교를 하대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는 타종교를 만날 때 교리로 만나지 않고 삶에서 만난다. 서로 소통하고 공감하면 신뢰가 쌓이고 이해가 생겨 배울 게 많아진다. “개신교는 기독교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지 않으면 교회의 기반이 흔들리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오 수사는 “가톨릭은 이미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가톨릭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선언했고, 불교는 그보다 훨씬 오래전인 400년대에 도생(道生) 스님이 ‘불자가 아니라도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며 “종교는 의식의 변화를 거쳐 더 크고 건강한 종교로 성장한다”고 강조했다. 역사의 물줄기는 거스를 수 없으며, 어떤 종교든 배타주의로 가면 스스로 섬에 갇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씨줄과 날줄이 서로 받아들여야 천이 짜입니다. 서로 거부하면 천을 짤 수가 없어요. 종교가 달라도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거기서 소통과 화합이 이뤄지는 겁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의 문제점을 ‘예수님이 우리 대신 짐을 졌으니, 우리는 고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데서 찾았다. 그러니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를 해도 반성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바르게 사는 삶을 무시하고 고달픈 것을 싫어한다는 것. 오수사는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고난 받으면서도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 이웃을 통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수사들은 일생을 가난과 정결, 순명의 삶을 살지만, 개인의 카리스마를 존중해 전문교육을 받도록 허용돼 있다. 수사 중에는 사회복지, 음악, 미술 계통의 대가가 많이 나왔다. 오 수사는 평신도를 위한 강좌시간에 동양사상을 통해 성서를 이해시키기도 하는데,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며 여간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감이 충만해진 오 수사는 성균관대에서 ‘다산 정약용의 성인관에 관한 연구’로 박사논문을 쓰는 중이다.

“유학을 성학(聖學)이라고도 하지요. 율곡의 ‘성학십도(聖學十圖)’, 퇴계의 ‘성학집요(聖學輯要)’는 가톨릭이 지향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수도를 통해 성인에 이르는 길을 밝혀봄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성인(聖人)의 길로 인도하고 싶습니다.”

가톨릭의 영성은 수도원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동서양 사상을 아우르며 인식을 넓혀주는 오수사의 강의는 많은 신자들에게 행복을 안겨줄 것 같았다.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tol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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