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NGO 정책 실현 앞장… 2014년 성인지예산 도입 확정
136국 중 성평등지수 95위 111위 한국보다 높아 성인지예산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 세계 90여개국은 대부분 유럽을 포함한 선진국이다. 이슬람권은 이 제도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성인지예산은 고사하고 남녀차별도 심하다는 게 일반적 인식이다. 성인지예산과 관련해 이슬람권에서 도드라진 변화를 보이는 나라가 인도네시아다. 인도네시아는 이슬람회의기구(OIC) 57개 회원국을 대표하는 나라다. 15억 세계 이슬람 인구 중 2억명가량이 인도네시아에 거주하고 있다.
◆세계 최대 이슬람 국가의 성인지예산 편성
1990년대 말 외환위기와 독재정권 하차 이후 등장한 인도네시아 역대 정부는 성인지예산제도 도입에 긍정적이었다. 난관 끝에 2014년까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에서 성인지예산제를 도입하기로 지난해 법령으로 규정했다. 성인지예산 도입의 초석은 인도네시아 수니 이슬람 단체 ‘나흐들라툴 울라마(NU)’의 지도자 출신인 압두라만 와히드 전 대통령이 다졌다.
그가 2000년 발표한 대통령령은 여성의 ‘성 주류화’(젠더 메인스트림)를 모든 정부 기관과 지방정부의 실천사항으로 올렸다. 이를 근거로 2000∼2004년 4년 사이에 19개의 성인지예산 시범 프로그램이 선보였다. 주로 반둥과 욕야카르타 등 지방 도시의 여성 교육 개선에 성인지예산이 투입됐다. 지방정부와 NGO의 선도적인 의지를 중앙정부가 수용한 형식이었다. 중앙정부에서는 예산의 5%를 여성과 아동에게 할당하는 내무부 법령과 성평등 향상을 명시한 중기개발계획도 도입됐다.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2007년 성인지예산서와 성인지결산서 도입이 확정됐다. 2009년엔 3년 기간으로 7개 중앙정부 부처와 산하기관에서 성인지예산제도를 확대 실시하기로 했다. 2010년부터는 국가개발계획부, 재무부, 내무부, 여성가족부(여성역량강화·아동보호부) 4개 부가 중심이 돼 5개년 전략계획을 마련하기로 했다.
점심 식사 후 휴식시간을 보내고 있는 인도네시아 여성 근로자들의 모습. 인도네시아에서는 재무부와 여성가족부 등 4개 정부 부처가 중심이 돼 성인지예산제 전략계획을 마련하기로 하면서 산업현장의 여성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
협연의 구체적인 사례로는 시민단체 ‘빅스’가 반둥 지방정부에 예산을 요구해 추진한 화장실 개선 사업을 들 수 있다. 2000년대 중반 많은 가구에서 화장실을 집안으로 들였으며, 관광지라는 특성이 고려돼 현대식 건물에 남녀 차별을 두지 않은 수유실이 마련됐다. 중앙정부도 영향을 받아 자카르타 등지의 일부 건물에는 남녀 차별이 드러나는 표시를 없애도록 했다.
◆정치 민주화·언론 자유가 든든한 배경
인도네시아의 성인지예산제 도입에는 여느 동남아 국가와 달리 언론 자유와 정치의 민주화를 달성한 배경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외환위기 와중에 인도네시아의 독재권력은 무너지고 중앙집권적인 통치 행태는 급변했다. 1998년 수하르토 32년 통치가 막을 내리면서 여야 정권교체 속에 4명의 대통령이 뒤를 이었고, 내년 6월 대선도 예정돼 있다. 외국 언론이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발전한 분야가 정치라고 할 정도다. 투명한 정치와 행정을 위해 여성의 사회 진출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다.
성인지예산제 도입의 배경을 마련한 ‘빅스’와 파티로(PATIRO·지역정보연구소) 등 시민단체 다수가 ‘레포르마시’(개혁) 시기인 1990년대 말에 태동했다. 지방 분권화 움직임도 가속화됐다. 일부 동티모르로 불렸던 티모르레스테와 파푸아뉴기니는 인도네시아 중앙정부에서 아예 독립했으며, 아체 등 지방정부도 분리독립을 주장했다. NGO들은 지역 실정에 맞는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개혁 시기에는 NGO와 대학연구소, 개별 지방정부가 노동현장의 성차별 해소에 초점을 뒀다. 이와 비례해 언론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일간지 창간은 자유롭고, 노동세력은 해마다 수십%씩 임금 인상을 이끌며 노동현장의 차별을 시정하고 있다.
◆한계와 시사점
세계경제포럼(WEF)이 지난달 말 발표한 ‘2013 세계 성 격차지수(Gender Gap Index) 보고서’의 성평등지수에서 인도네시아는 조사 대상 136개국 중 95위로 한국(111위)보다 높았다. 인도네시아 언론인 라흐맛 나수티온은 “이웃 나라인 호주가 성인지예산제를 도입한 1990년대에 관련 소식이 즉시 시민사회에 전해질 만큼 인도네시아는 생각보다 개방적인 나라”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여러 한계점이 노출됐다. 지방과 NGO의 적극성을 중앙정부가 수용한 과정에서 수도가 자리 잡은 자바섬의 대도시에 비해 다른 지역의 제도 도입은 늦었다. 이슬람의 일부 보수세력도 여전히 장애 요인이다. ‘성인지예산’은 고사하고 ‘젠더(성)’라는 말도 사용하지 못하는 곳이 많을 정도다. 여기에다 성인지예산제도가 시범 프로그램을 거치고 있지만 체계적인 통계도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이지만 인도네시아의 경험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낮은 개발도상국이면서 이슬람 국가로 인식되는 한계에서도 성인지예산제도 정착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가난과 낮은 교육 수준, 전통적인 남성우월적 관행을 타파하려는 시민단체의 노력을 보수적인 중앙정부가 수용한 점은 도드라져 보인다.
자카르타·반둥=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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