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오전 11시 서울 강남역 인근 삼성물산 역삼사옥 앞. ‘삼성물산 규탄 집회’에 참석한 정모(73)씨는 노구를 이끌고 길거리에 서 있는 게 매우 분에 겨운 모습이었다.
정씨는 서울 용산구 국제빌딩 주변 제4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 조합원이다. 그는 4구역 내 대지 약 211㎡에 7∼8개의 가게를 열어 월세만 1000만원 정도 받을 정도로 돈을 벌었다. 하지만 2008년 관리처분인가 뒤 차곡차곡 진행되던 재개발 사업이 2009년 ‘용산참사’와 이어진 부동산 경기 침체 등으로 계속 늦어지면서 거액의 은행 빚에 이젠 생계를 걱정할 처지로 전락했다.
지금은 자녀가 챙겨주는 용돈으로 근근이 버티는 신세다. 정씨는 “그래도 이제나저제나 사업이 재개될까 기대했지만 삼성물산이 이 구역 개발 사업에서 사실상 손을 떼기로 하면서 조합원이 다 죽게 생겼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50여명 중 대부분은 정씨처럼 70대 이상 노인이다. 축 늘어진 표정의 이들은 각자의 손에 ‘힘없는 조합원만 쪽박 찼다’, ‘용산참사보다 더 큰 용산참사 예상된다’고 적힌 피켓 등을 들고 있었다. 이모(77)씨는 “생계 수단은 없는데 매달 이주비로 은행에서 빌린 돈의 이자만 300만∼400만원씩 나가니 나보고 죽으란 소리냐”고 외쳤다.
애초 용산4구역 재개발사업은 2006년 조합 설립 인가를 시작으로 2007년 사업시행 인가 취득, 관리처분총회 개최 등 원활한 추진을 이어갔다. 삼성물산(40%)과 대림산업(30%), 포스코건설(30%) 등의 컨소시엄이 시공사로 선정됐다.
하지만 건물 철거 과정에서 2009년 세입자 등이 사망한 용산참사가 나면서 사업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이후 2011년 사업시행 변경인가를 받으며 한숨 돌리나 했지만 이내 4개월 뒤 시공사와 마찰을 겪었다. 총 공사비 6000억원에 도급계약을 체결한 컨소시엄은 용산참사에 따른 공사 지연 및 부동산 경기 침체 등을 이유로 공사비 630억원과 예비비 900억원 등 총 1530억원의 추가 비용을 요구했다.
용산4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조합원들이 13일 서울 강남구 삼성물산 역삼사옥 앞에서 용산 재개발 사업 재개와 이주비 이자 및 사업비 지원 등을 촉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이재문 기자 |
결국, 조합은 2011년 시공사를 상대로 도급공사계약 해지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이듬해 시공사 지위를 박탈하는 판결을 했다. 정우철 조합 사무장은 “판결 뒤 삼성물산 등은 항소하면서 시공사 지위 재확인 등을 해주면 사업을 재개하겠다고 했는데, 이를 재확인하는 총회가 개최된 뒤 태도가 돌변했다”며 “조합원 이주비 이자와 사업비 대여도 계속 중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합은 삼성물산을 상대로 감사원 감사청구와 공정거래위원회 제소 등을 이어갈 계획이다. 사업 추진 과정에서 프로젝트파이낸싱(PF) 자금 흐름 등을 확인해 시공사 컨소시엄에 문제가 없는지도 들여다본다는 계획이다.
이춘우 조합장은 “사업이 지지부진한 상태로 10년을 넘기면서 과다 대출 등으로 나도 10억원이 넘는 채무를 떠안고 있다”며 “대부분 다세대주택이나 상가를 갖고 생계에 어려움 없이 살다가 막장까지 몰린 우리 조합원 300여명은 시공단의 횡포와 만행에 맞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해 목숨 건 투쟁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물산은 “사업 참여를 위해 조합과 협의했으나 합의에 실패했다”며 “빠른 시일 내 새 시공사가 선정돼 사업이 정상 추진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나기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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