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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검시 리포트] “무덤 파서라도 조사”… 조선시대가 검시 한수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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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9-15 19:21:49 수정 : 2014-09-15 19: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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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심 변사는 두번 검시 원칙
결과 불일치땐 4검도… 철저 규명
“지금의 검시제도는 조선시대보다 못하다.”

경북대 채종민 교수(법의학교실)의 평가다. “조선시대에는 죽은 자가 억울하면 저승에 가지 못하고 떠돈다고 해서 억울함을 없애자는 의미에서 검시를 철저하게 했다”는 것이다.

1937년 당시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사법제도 연혁도보에 묘사된 조선시대 검시 모습. 혹시 모를 증거를 찾기 위해 시신 옷을 모두 벗긴 후 술찌꺼기, 식초, 물 등으로 시신 몸을 세척한 후 검시했다고 한다.
수사기법이야 현대가 비교할 수 없는 우위이나 진실을 끝까지 파헤치겠다는 정의 구현 의지와 국민의 마지막 인권을 대하는 자세는 조선시대가 낫다는 얘기다.

특히 조선시대에 살인이 의심되는 변사사건은 “봉분(무덤)을 파헤쳐서라도 정확하게 조사해야 한다”(정조)는 지침이 법에 명시될 정도로 철저한 검시가 이뤄졌다. 또 살인 의심 변사는 원칙적으로 두 번의 검시를 실시하고, 두 명의 ‘사또(조선 지방관 속칭)’가 개별적으로 조사하도록 했다.

최초로 이뤄지는 검시를 초검(初檢), 두번째를 복검(覆檢)이라 하는데 초검관은 복검에 참여하지 못하고, 복검을 할 때는 초검의 기록을 절대 열람할 수 없다. 초검관과 복검관이 만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초검관과 복검관이 각각 조사한 결과가 일치하면 사건을 종결했지만, 그렇지 않거나 의심이 가는 경우에는 형조, 지금의 법무부에서 파견된 관원 또는 해당지역 관찰사가 임명한 특별검시관이 3검, 4검을 할 정도로 집요하게 매달렸다. 사또는 사건 조사부터 기소, 판결까지 다 해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법의학적 지식을 갖춰야 했다. 수사가 잘못되면 파직을 당할 정도로 책임도 엄중하게 물었다

검시보고서에는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되, ‘글자가 많은 것을 싫어하지 말라’며 주(註)를 달아 자세히 쓰도록 했다. 이 같은 수사 원칙과 기법은 ‘원통함이 없게 하라’는 뜻의 일종의 검시 지침서 ‘무원록(無寃錄)’이 근간이 됐다. 

증수무원록
1308년 중국 원나라 왕여(王與)가 저술한 이 책은 조선에 들어와 100여년이 지난 세종 20년(1438) 11월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으로 완성됐다.

이후 영·정조대를 거치면서 혼란한 사회상과 다양한 범죄수법을 반영해 구택규·구윤명 부자의 ‘증수무원록대전’, 그리고 서유린의 ‘증수무원록언해’로 발전했다.

물론 당시 조선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부검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사의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수많은 변사사건의 사망원인을 규명하고 강력범죄를 해결했다는 것은 부검을 하지 않고도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법의학과 과학수사 기술이 발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경인교대 김호 교수(사회교육과)는 “조선은 법의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고 그것이 법의학에 대한 요구로 이어져 동아시아에서 중국에 이어 두번째로 법의학을 수용한 것”이라며 “(현대가) 과학기술은 더 발달했을지 몰라도 국민 죽음에 대한 국가의 의지나 책임은 후퇴한 것 같다”고 말했다.

특별기획취재팀=박성준·김수미·오현태 기자 special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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