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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일제에 항거한 처절한 몸부림, 그 속에 배인 절절한 사연

입력 : 2015-02-26 19:10:03 수정 : 2015-05-18 19:5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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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본 항일운동 유산 1133건 문화재 하면 떠올리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 차라리 남루하다. 도약과 발전의 찬란한 증거도 아니다. 끝 모를 아픔과 폭압에 대한 처절한 몸부림에 가깝다. 하지만 서늘한 결기와 확고한 전망을 품었다. 깃들어 있는 이야기는 또 한없이 절절하다. 우리 역사의 가장 어두웠던 시절 일제강점기, 그때 만들어진 항일독립운동 관련 유산이란 대개 그렇다. 문화재청의 용역으로 지난해 실시된 ‘근대문화유산 항일독립운동분야 목록화 조사 연구’의 대상 유물 1133건이 품은 이런 가치와 특성은 명확하다.

◆확고한 전망

1919년 3월1일, “조선의 자주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한 ‘3·1 독립선언서’는 민족자결·자주에 입각한 독립의 당위성을 분명히 하며 전국을 뒤흔든 ‘독립만세’의 함성을 이끌었다. 독립선언서에는 광복에 대한 굳은 의지, 깊은 염원과 함께 거침없는 논리가 응축돼 있다. 

1919년 2월 만주 지린에서 김교헌 등 39명의 명의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
1919년 2월 만주 지린에서 김교헌 등 39명 명의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는 최초의 독립선언서다.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국임과 민주의 자립국임을 선포”하면서 2000만 동포들에게 “육탄혈전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을 독려한 것이 눈에 띈다. 같은 달 간도에서는 애국부인회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발표했다. 부녀자들도 독립운동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는 격문 성격이었다. 김숙경, 김오경, 고순경 등의 서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조사팀은 “다양한 독립선언서가 있음을 알 수 있는 자료”라고 평가했다.

1919년 3월19일 일본 오사카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표본실의 청개구리’로 유명한 소설가 염상섭이 작성한 것이다. 그는 “우리 한국은 4300년의 존엄한 역사를 가졌고, 일본은 한국에 뒤처지기를 1000여년이다. 이 사실만 보아도 조선 민족과 일본 민족은 하등 서로 관련된 바 없음을 알 수 있다”고 선언했다.

◆결의 그리고 희생

처참한 현실에 대한 울분, 독립에 대한 강렬한 열망은 때로 목숨을 요구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일제가 지배한 하늘 아래 살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언제든 직면할 수 있는 죽음에 의연히 맞섰다. 을사늑약 체결 후 처음으로 자결 순국한 민영환은 가로 6.2㎝, 세로 9.2㎝의 작은 명함에 유서를 남겼다.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라도 기어이 도우리니…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어서라도 마땅히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며 자신의 죽음을 고했다. 그는 명함을 포함해 세 통의 유서를 남겼는데 하나는 일제의 침략을 적시하며 서울 주재 외국사절에게 한국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고, 나머지 하나는 황제에게 올렸다. 

문용기의 두루마기
문용기의 두루마기는 3·1운동 당시 익산역 집회에 참가했을 때 입었던 것이다. 일본 경찰은 독립을 위한 궐기를 호소하던 그의 오른손에 칼을 내리쳤고,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전진하자 왼손마저 절단했다. 양 손을 잃고서도 문용기는 군중을 지도했고, 결국 칼에 찔려 순국했다. 두루마기에는 핏자국이 선명하다.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에 있는 권오설의 철관은 죽어서도 탄압받았던 독립운동가의 가혹한 운명을 증언한다. 권오설은 1930년 4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시신은 고향인 안동으로 옮기기 위해 운반이 쉬운 철관에 임시로 수습됐다. 그런데 고향에 도착해 나무관에 옮기려 하자 경찰이 막아섰고, 그대로 묘지에 묻혔다. 2008년 후손들이 권오설과 부인의 유해를 합장하려고 무덤을 열었다가 남아 있던 철관의 일부를 확인했다.

죽어서도 일제 탄압받은 권오설의 철관
◆생활의 흔적


독립운동가의 거대한 행적에 압도되면 그들의 일상을 떠올리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그들 역시 생활인이었고, 일상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물이 남아 애틋함을 더한다.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에는 조카를 향한 유관순의 살가운 애정을 보여주는 모자가 있다. 1917년 사촌인 유경석과 노마리아의 아들 유재광에게 직접 뜨개질을 해 선물한 것이다. 여성적 섬세함이 또렷한, 단아한 모자에서는 그녀가 맞닥뜨려야 했던 기구한 운명을 읽어낼 수 없다. 

유관순이 조카를 위해 직접 뜬 모자
도산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이 평생 사용했던 재봉틀은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고단한 삶, 동시에 그것에 굴복하지 않았던 강한 생활력을 전한다. 남편을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이혜련은 재봉틀로 다섯 자녀의 교육비를 벌었다. 이 중 일부는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였다고 한다.

신흥무관학교, 경학사 등을 세워 독립군 양성에 힘썼던 이회영은 뛰어난 그림 솜씨를 갖고 있었다. 특히 난을 즐겨 그렸는데 필치가 흥선대원군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회영은 1910년 망명을 떠나면서 제자이자 동지인 윤복영에게 난을 그린 부채를 전했다. 고고한 난과 함께 ‘蘭以證交’(난이증교·‘이 난초로 사귐의 증표를 삼는다’)라 써넣었다. 4점의 묵란도는 미술사적인 가치를 가진 것으로도 평가받는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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