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페르니쿠스가 19살 때인 1492년 여름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넜다. 가도 가도 육지가 보이지 않자 선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지구가 평평하다는데, 이렇게까지 먼바다에 나가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공포심은 컸지만 금화에 대한 욕망이 더 컸다. 끝내 그들은 4개월 만에 남미의 섬 산살바도르에 상륙할 수 있었다. 이어 1498년 바스코 다 가마는 인도양 항로를 발견했다.
지구가 사각형이 아니라는 것은 콜럼버스도, 바스코 다 가마도, 코페르니쿠스도 알았다. 이런데도 1609년 로마 카톨릭 교회의 종교법정은 “지구는 그래도 돈다”고 말하던 갈릴레이의 입을 봉쇄했다. 이어 7년 후엔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금서에 포함시켰다. 갈릴레이는 1992년에야 복권됐다. 코페르니쿠스 조국인 폴란드는 죽은 지 거의 4세기 반이 지난 2010년에야 그의 장례식을 치르고 복권시켰다.
헌법재판소가 그제 ‘김영란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전원재판부에 회부했다. 언론인과 사립학교 교원을 대상에 포함한 것 등이 쟁점이다. 김영란법은 내년 9월28일 시행될 예정이다. 그때까지 헌재 결정이 나올 가능성은 낮다. 국민의 기본권이 피해를 입지 않으니 그렇다고 한다. 더구나 180일 내 결정하라는 헌재법은 헌재 스스로 지키지 않고 있으니 죽은 법률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왜 각하하지 않았는지 미심쩍다. 발효된 뒤 헌법소원이 제기되면 그때부터 집중 평결해도 될 텐데 말이다.
부패방지법인 김영란법이 통과되자 유명 교수는 “따끈한 국물을 못 먹게 됐다”고 아쉬워했다. 국민의 70%는 변화의 쪽에 서 있지만 기득권을 내려놓는 것은 말만큼 쉽지 않다. 가진 게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그럴 터. 17세기 초 종교법정은 낡은 교리(이론)에 얽매여 기득권을 지키다 사회적 변화와 등졌다. ‘정의의 파수꾼’을 자임하는 헌재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 순간 종교법정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백영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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