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거장에서 때를 기다려 그곳에서 일을 결행할 생각이오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곳의 김성백씨에게 돈 50원을 차용하니, 속히 갚아 주시기를 천만 번 부탁드립니다.”
이강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된 ‘해조신문’(海朝新聞)과 ‘대동공보’(大同共報) 제작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계획을 설명하고, 빌린 돈을 대신 갚아줄 것까지 청했다는 것은 이강이 의거의 계획 단계부터 참여했음을, 또 안중근이 그에게 물심양면으로 의지했음을 보여준다. 엽서는 러시아 동포사회에서 벌였던 독립운동의 증거인 셈이다. 특히 언론을 통해 동포들의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소통과 교류를 이어갔음을 알려준다.
한국민족운동사학회가 3일 전쟁기념관에서 ‘한인독립운동과 러시아에 대한 재조명’을 주제로 여는 학술대회에서 이런 사실들이 구체적으로 소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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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
일본 군부가 1909년 12월 작성한 문건에는 “이번 사건(이토 저격)은 대동공보사의 이강, 유진률… 등의 교사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됨”이라고 적혀 있다. 일제가 배후로 지목한 이강, 유진률은 1908년 11월 창간호를 낸 대동공보의 주필과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각각 참여하고 있었다. 수원대 박환 교수는 발표문 ‘러시아지역 한인언론과 유진률’에서 “1909년 10월 10일 대동공보사의 사무실에서 유진률, 정재관, 이강, 윤일병, 정순만 등이 모인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위한 조직이 이루어졌다”고 밝혔다. 당시 대동공보사에는 안중근 동료들이 일하고 있었는데, 이강은 의형제라는 설이 있다. 실제 안중근은 이강에게 보낸 엽서에 ‘아우 안중근’이라고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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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언론 대동공보 주필 이강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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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이 이강에게 쓴 편지 안중근은 이강에게 엽서를 보내 이토 히로부미 저격 계획을 알리고, 빌린 돈을 대신 갚아달라고 부탁했다. 러시아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이강이 독립운동에 깊숙이 관여했음을 보여준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
19세기 말 이래 계속된 이주로 러시아에는 한인사회가 형성되었으나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특히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륙 진출을 추진하면서 두 나라가 협상을 통해 이익을 조정해가자 동포들 고난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포들은 의병부대를 조직했고, 학교 설립을 통한 민족교육을 도모했다. 이런 양상의 또 다른 한 면이 언론활동이었다. 1908년 2월 26일 창간한 해조신문은 러시아 동포들이 만든 첫 신문이었다. 독립기념관 김형목 연구원의 논문 ‘한말 연해주지역 한인 독립운동과 러시아’에 따르면 신문 발간을 주도한 최봉준은 “일본의 보호국이라는 ‘더러운 칭호’를 받고 있다”고 한탄했고, 발간 취지서에서 “국권회복 도모와 민족정신 앙양이 신문 간행의 목적”임을 천명했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와 주필로 참여했다. 해조신문이 3개월 동안 75호를 내고 폐간되자 뒤를 이은 것이 대동공보였고, 대양보 등도 발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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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동포들이 처음으로 만든 신문인 ‘해조신문’. 동포사회에서 민족언론은 교류와 소통의 매개체였다. 독립기념관 제공 |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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