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순임(70)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회장. 1973년 4월 출범한 이 유족회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일제에 의해 군인, 군속, 노무자, 여자근로정신대, 일본군 위안부 등으로 끌려간 한국인 피해자와 그 유가족이 모여서 만든 피해자 단체다. 유족회는 지난해 9월 일본 정부의 고노(河野) 담화(1993년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 인정 담화) 검증 파문 속에서 1993년 일본 정부 대표단이 위안부 피해자 증언을 직접 듣는 모습이 담긴 영상을 21년 만에 공개해 주목을 받았다.
한·일 간 최대 외교 현안으로 부상한 위안부 문제로 그를 취재하며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이 있었다. 칠순의 여성을 이 어려운 현장에 서 있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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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임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회장이 지난달 19일 서울 종로구 당주동 유족회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인 올해 일본군 위안부 백서를 자체 발간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다. 양 회장 뒤에는 우리 겨레 상징인 흰색 치마저고리가 걸려 있다. 남정탁 기자 |
인생의 전환기는 1971년 정부가 태평양전쟁 희생자 접수를 하면서다. 전남 순천에 있던 시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와 희생자 신고를 하러 갔는데 접수 거부를 당한 것이다. 호적에는 시아버지가 집에서 사망했다고 기재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 회장은 “이승만 대통령 시절 징병, 징용 갔다 돌아오지 않은 행방불명자들의 사망신고를 허용했다. 그러니 집안 어른들이 집에서 사망한 것으로 했던 게 화가 됐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1973년 유족회 창립 발기인으로 뛰어들었다. 1991년 위안부 문제를 특종 보도해 일본 우익의 공격을 받는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전 아사히 신문기자가 그의 사위다. 양 회장은 “사위는 유족회 사무실을 돕던 딸과 내 성(姓)이 달라 모녀지간인지 몰랐다고 한다. 내 딸인 줄 알았으면 무서워서 사귈 엄두도 못 냈을 것이라고 한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사위가 나 때문에 애로가 많다. 애환이 있다”고 미안해했다. 일본 우익은 우에무라 전 기자가 양 회장의 사위임을 빌미로 그가 쓴 기사의 공정성에 흠집을 내곤 했다. 양 회장이 2011년 억울한 사기 공모 혐의로 구속·기소되자 일본 우익의 공격은 더 집요해졌다. 그는 “양순임이 ‘사기꾼’이 됐다고 하니 일본 우익이 대환영을 했다. 위안부와 관련된 모든 기사도 사기로 몰고갔다”고 말했다. 양 회장은 지난해 8월 무죄가 확정됐다.

양 회장의 시어머니는 1984년 72세의 나이로 한 많았던 삶과 이별을 고했다. 시어머니는 시아버지의 사망일자까지 받았는데도 죽는 날까지 남편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제사도 지내지 않고 시아버지 생일에 맞춰 생일잔치만 했다고 한다. 양 회장은 이제 그 시어머니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이제 질곡의 한·일 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한다고 생각할까. “일본 지도자가 문제지, 일본 국민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이 말에 반대한다. 그 전쟁을 수행하고 인간성을 능멸한 짓을 한 사람이 모두 일본 국민이다. 일본 국민이 반성하고 그에 상응하는 배상을 해야 한다. 위안부를 강제연행 안 했다고 하는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역사를 올바로 써야 한다.”
김청중 기자 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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