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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원칼럼] 허준의 후예들에게 보내는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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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6-15 20:51:20 수정 : 2015-06-15 20:5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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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세 때 역질에 맞서 벽역신방 쓴 허준
'活人 정신'이 일궈낸 조선 의학
메르스와 싸우는 그의 후예들 반드시 이기기를…
‘명의’ 허준(許浚)은 사람 살리기에 신들린 사람이다. 서자 출신이지만 천재였다. 누구도 고치지 못하는 병을 고치니 최고 어의로 대접받았다. 선조의 죽음을 막지 못해 귀양도 갔지만 나중에는 일품 벼슬에 올랐다. ‘동의보감’. 선조 때 시작해 14년 만에 완성한 역작이다. 조선 한방은 이후 그가 닦아 놓은 길을 따라갔다. 동의보감이 전부라면 ‘보통 천재’로 남았을 터다.

더 중요한 책이 있다. ‘벽역신방’(辟疫神方). 벽(辟)은 밝힌다·다스린다, 역(疫)은 역질·염병을 뜻하는 글자다. 역질을 밝혀 다스리는 책이다.

허준이 이 책을 쓴 것은 1613년이다. 붓을 든 이유가 참담하다. 두 해 전인 1611년 12월 두만강변 온성에는 여역(癘疫)이 번졌다. 여역은 전염되는 모든 열병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때 돈 것이 무슨 병인지는 알 길이 없다. 많은 사람이 숨졌다. 이듬해 북변에는 역질이 또 돌았다. “여러 고을에 집집마다 병을 앓아 죽은 사람은 백천을 헤아린다”고 했다. 난리가 났다. 사간원에서는 “사상자 숫자도 보고하지 않는 함경도 감사를 벌하라”고 주청했다. 뒤늦게 올라온 장계에는 “여역으로 숨진 사람이 2900명에 이른다”고 했다. 그때에도 병은 번지고 있었으니 숨진 사람은 얼마나 많았을까. 역질은 강원도로도 번졌다. 광해군은 의생을 보내고, 약을 보냈다.

활인(活人)의 술을 평생 갈고닦은 허준. 수많은 사람이 역질에 쓰러져 가니 얼마나 참담했을까. 74세의 노인 허준은 붓을 들었다. 침침한 눈에 떨리는 손으로 한 자 한 자 써내려갔을 터다. 그 책이 바로 벽역신방이다. 왜 책 이름에 신(神) 자를 붙인 걸까. “나보다 나은 사람이 있느냐”는 오만함일까. 아니다. ‘믿음을 잃으면 죽음이 가깝다’는 생각으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한 흔적이 역력하다. 2년 뒤 허준은 눈을 감는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여역의 재앙에 맞설 더 훌륭한 많은 의생이 나오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허준이 ‘명의 허준’인 것은 벽역신방에 담은 ‘활인 정신’을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르스가 나라를 덮쳤다. 병원 근처엔 얼씬거리기조차 싫어한다. 그 병원 중환자실 간호사의 글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한림대 동탄성심병원의 김현아씨. 41세, 가족도 있다. 편지에 이렇게 썼다.

“좋아질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매일 가래를 뽑고 양치를 시키던 환자는 황망히 세상을 떠나고, 나중에야 그 환자와 저를 갈라놓은 게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의 병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 그녀를 격리실 창 너머로 바라보며 저는 한없이 사죄해야 했습니다. 미리 알지 못해 죄송하고, 더 따스하게 돌보지 못해 죄송하고, 낫게 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김씨도 격리 대상이다. 얼마나 비장했을까. “N95 마스크를 쓰고, 방호복을 겹겹이 입고, 환자를 돌본 뒤에는 손이 부르트도록 씻는다”고 했다. 그 병원에는 김씨와 똑같은 처지의 의사와 간호사 95명이 동분서주하고 있다. 저승사자에게 ‘내 환자’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강호원 논설위원
동탄성심병원뿐일까. 삼성서울병원에는 291명의 의료진이 격리됐다. 평택성모병원, 서울의료원, 강동경희대병원…. 봉쇄된 병동에서 메르스 환자를 살리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자가 격리가 해제되면 환자를 돌보기 위해 병원으로 또 달려간다. 환자가 있으니 가지 않을 수 없다. 두렵지 않을까. 집을 나설 때마다 아내가, 아들딸이 하는 말,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 한마디에 가족 얼굴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될 터다.

메르스에 감염된 의사와 간호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낫게 해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참담한 마음으로 메르스에 맞서 싸우는 ‘여역과의 전쟁’이 남긴 상흔이다.

슈바이처만 위대한 걸까. 에볼라가 번진 아프리카 시에라리온 땅으로 달려간 우리의 의료진, 지금 이 시간 메르스 바이러스 가득한 병실에서 환자를 돌보는 우리의 의료진. 그들이 슈바이처에 미치지 못할까.

우리의 의료진은 활인의 정신을 이어가는 허준의 후예다. ‘활인의 신방(神方)’을 펼쳐 보이기를 소원하며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강호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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