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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행복한 시간?… 生이 멈추는 순간”

입력 : 2015-10-08 23:14:48 수정 : 2015-10-08 23: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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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키 큰 세 여자’
연극 ‘키 큰 세 여자’의 대사는 독하다. “(늙어가며) 어떻게 변할지 미리 알려주면 거리에 젊은이들 시체가 가득할 걸.” “가장 행복한 순간, 그런 게 있어?” “가장 행복한 순간은 다 끝나는 순간, 우리가 멈추는 순간, 멈출 수 있게 되는 순간.”

곱씹어보면 슬프고 냉소적인 말이다. 극본을 쓴 미국 작가 에드워드 올비는 생고기를 던지듯 노화와 죽음의 실체를 툭툭 내놓는다. 그런데 막이 내려도 스산한 감정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따뜻하다. 주인공인 ‘키 큰 여자’가 공연 내내 나쁜 기억을 말함에도 담담한 웃음이 떠오르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의 인생을 대차대조표로 만들면 ‘불행’ 쪽에 무게추가 기운다.

부유하지만 키가 작고 외눈인 남편은 바람을 피웠다. 시아버지는 집적댔고,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미워했다. 외아들은 20년째 연을 끊었다. 동생은 술주정뱅인 데다 어머니는 “내가 변하는 것보다 더 많이” 변해 버렸다. 여자는 외톨이로 90대를 맞았다. 알츠하이머를 앓는데 한쪽 팔마저 부러졌다. 죽음이 눈앞이다.

씁쓸한 여정임에도 이 작품이 마음을 감싸안는 이유는 인생을 통찰하는 깊은 시선 때문이다. 작가는 인생의 행복이란 테마파크처럼 구김살 없는 웃음이 아님을 암시한다. 대다수의 삶은 20대에 꿈꾸는 것만큼 화려하지 않다. 젊은이는 주변의 중년과 노년을 보며 ‘내 인생만은 다를 것’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노화와 죽음은 어김없이 기대하지 않은 얼굴로 문을 두드린다.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인생의 굽이굽이는 모두 소중하고 행복하다. 키 큰 여자는 말한다.

“한 번 넘어지면 생각보다 별 거 아닌 걸 알게 되지. 좋은 시절이란 그런 거야.”

작가 올비는 이 작품으로 1994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외에도 퓰리처상을 두 번 더 받았으며, 미국 최고 연극상인 토니상 최우수극작 및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이번 무대는 배우 박정자(73)와 손숙(71)이 7년 만에 만나 더욱 화제다. 박정자는 자신보다 스무살이 많은 90대, 손숙은 스무살이 적은 50대 인물로 분한다. 연극계 두 대모는 연기하지 않는 듯 연기하는 자연스러움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이들은 작위 없이 힘을 뺀 채 50대 간병인에서 부유한 중년으로, 90대 알츠하이머 환자에서 삶을 반추하는 너그러운 노인으로 옮겨간다.

연극의 구조는 독특하다. 제목과 달리 작품의 주인공은 키 큰 여자 한 명이다. 박정자, 손숙과 국립극단 시즌 단원 김수연은 1인2역을 맡는다. 1막에서는 90대 치매환자의 횡설수설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50대 간병인과 20대 변호사 사무소 여직원이 이를 지켜본다. 2막에서는 92살, 52살, 26살 시절의 ‘키 큰 여자’가 한 공간에 모여 자기 인생을 더듬는다. 26살의 여자는 늙은 자신을 보며 “그럴 리가 없어, 우리가 어떻게 변하죠”라고 반문한다. 자신의 노년을 미리 본다면 누군들 그러지 않을까.

작가는 키 큰 여자의 인생을 비극적 코미디로 풀어간다. 대사에는 웃음이 배어 있다. 연출은 밝고 담담하다. 이병훈 연출은 감정을 몰아세우는 극적인 과장을 배제했다. 무대 역시 밝고 고급스럽다. 여자의 방은 풍부한 곡선과 장식을 더해 고풍스럽게 꾸며놓았다. 25일까지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다. 2만∼5만원. 1644-2003.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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