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산 중형차를 운전하는 김모(39)씨는 지난 10월 한 유명 수입차를 들이받는 접촉사고를 냈다. 다행히 큰 인명사고는 없었지만, 양쪽 차량의 범퍼가 긁혔다. 비교적 작은 접촉사고라 큰 부담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보험 처리를 한 김씨는 얼마 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했다. 보험사 직원으로부터 상대 차량 수리비로 550만원이 나왔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다. 보험사 직원은 "피해 차량 주인이 범퍼 교체를 원해 수리비로 150만원이 나왔고, 동종 차량을 10일 빌리는데 따른 렌트비가 400만원 나왔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아무리 수입차라고 해도 수리비가 이렇게 많이 나올 줄은 몰랐다"며 "내년에 보험료가 얼마나 오를지 벌써부터 걱정"이라고 하소연했다.
일반 차량 운전자들이라면 한번쯤은 고가의 수입차 등 고가차량 운전자에게 순순히 끼어들기를 허용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수입차가 접근해 방향지시등을 켜면 평소의 운전습관과는 별개로 자신도 모르게 브레이크부터 밟게 된다. 주차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가까운 위치에 빈 공간이 있어도 바로 옆에 대형 수입차가 있으면, 조금 더 차를 몰아 국산 중소형차 근처에 주차를 한다.
◆수입차와 사고 및 과실비율 떠나 엄청난 수리비 부담
이는 이른바 '고가차 공포증' 때문이다. 만약 수입차와 사고라도 나면 일반차량 운전자들은 과실 비율을 떠나 엄청난 수리비를 물어야 하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이르면 내년 4월부터 고가차량이 야기하는 부담스러운 수리비·렌트비 문제가 대대적으로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금융위원회는 지난달 18일 '고가차량 관련 자동차보험 합리화 방안'을 마련, 본격적인 추진 작업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금융위에 따르면 지난 2008년 4월부터 2013년 12월 사이에 일어난 교통사고 중 범퍼를 교체한 비율은 70.1%다. 즉, 교통사고가 나면 10건 중 7건은 범퍼를 바꾼다는 얘기다.
금융당국은 올해 안에 경미사고에 대한 수리기준을 마련하고 내년 상반기 중 표준약관에 반영하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범퍼 커버만 살짝 긁히거나 찍힌 정도 일 경우 '무조건 교체'는 불가능해진다. 범퍼의 기능이 훼손되지 않는 한 도장·판금 방식으로 수리하는 게 원칙이 된다. 경미사고 수리 기준이 시장에 안정적으로 정착되면 범위는 범퍼에서 휀다와 도어 등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살짝 긁혀도 무조건 범퍼 교체? “이제 앙대영”
아울러 렌트비 지급 방식도 변경된다. 현재 자동차보험 표준약관에는 피해자가 '동종 차량'을 렌트하게 돼 있어 사고시 연식이 오래된 구형 수입차를 타도 최신형 수입차를 빌릴 수 있다. 앞으로는 동종의 차량이 아닌 배기량 및 연식이 유사한 '동급 차량' 중 최저요금을 렌트비로 지급하도록 바뀐다. 또 렌트기간을 늘리는 것을 막기 위해 정비업자에게 차량을 인도, 수리가 완료되는 시점까지를 렌트기간으로 인정할 방침이다.
앞서 보험료 할증을 고민하고 있는 김씨 사례로 돌아가보자. 금융당국의 계획대로 내년 상반기 중 고가차량 관련 자동차보험이 합리화되면 이같은 상황에서 김씨는 상대차량 수리비로 약 420만원을 절약할 수 있다. 보험사의 도움을 받아 개선될 자동차보험 제도를 김씨 사례에 적용한 결과, 피해차량의 수리비는 범퍼교환 130만원에서 도장 50만원으로 80만원 줄어든다.
게다가 렌트비 감소폭은 더 크다. 현행법규에 따르면 동종 수입차 일일 렌트비 40만원에 렌트기간 10일이 적용돼 총 렌트비는 400만원이다. 하지만 제도가 개선되면 동급 국산차 일일 렌트비 8만원에 렌트기간은 7일로 단축돼 총 렌트비는 56만원에 그친다. 이에 따라 총 수리비는 530만원에서 단 106만원으로 424만원이나 준다.
◆경미한 사고 수리 관련 대물배상 부담 대폭 ↓
전문가들은 "이번 개선방안은 고가 차량이 사회에 유발하는 각종 고비용 구조를 개선하고 제도를 악용한 각종 보험사기를 근절하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라며 "제도 개선으로 렌트비는 연간 800억원이 절감되고 경미사고 수리와 관련한 대물배상액 부담도 대폭 감소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오는 2018년부터 자동차보험 할인·할증기준을 사고 횟수에 따른 '건수제'로 일괄 전환하려던 금융당국의 계획이 갑자기 변경되면서 보험업계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19일 서울 영등포 중소기업중앙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중소기업인 간담회에서 "자동차보험 할인·할증기준은 기본적으로 현행 점수제를 유지한다"고 말했다. 이는 지난해 8월, 1989년 도입된 점수제를 2018년부터 건수제로 변경하겠다던 금융감독원의 계획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금융위 측은 "지난해 금감원의 발표가 있었지만 사고 크기로 할인·할증기준을 메기는 점수제와 건수제 중 무엇이 더 합리적이냐를 두고 최근까지도 의견이 엇갈렸다"며 "시장에 다양한 보험 상품이 공급돼야 소비자들의 합리적인 선택이 이뤄진다는 취지하에 보험사가 점수제와 건수제를 선택적으로 도입할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선택적으로 건수제 도입, 업체간 눈치싸움 심화 우려
상황이 이렇자 업계는 입장이 난처해졌다. 일단 금융위와 금감원이 엇박자를 내면서 1년 만에 자차보험 할인·할증제도 방향을 새로 잡아야 하는 상황이 됐기 때문. 업계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보험업계의 자율성을 얘기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 과정에서 엇갈린 정책을 내놓으며 적잖은 혼란을 주고 있다"며 "선택적으로 건수제를 도입할 경우 건수제가 낫냐 점수제가 낫냐를 두고 업체간 눈치싸움이 심화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실효성에 대한 논란도 일고 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건수제 상품의 경우 일단 사고가 나면 할증이 되기 때문에 경미한 사고가 났을 경우 보험사에 신고를 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처리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할 수 있다"며 "보험료 인상 가능성이나 개인 비용 처리에 따른 위험성 등을 감안했을 때 시장에서는 건수제보다 현재의 점수제가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할 듯 하다"고 전망했다.
◆선택에 따른 가격 변동성 크게 나타날 수 있어
건수제와 점수제가 선택적으로 도입될 경우 업체뿐만 아니라 소비자들에게도 선택에 따른 가격 변동성이 크게 나타날 수 있다면서 앞으로 시장에 어떤 반응이 나타날지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업계 한 관계자는 “시장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실제 제도 시행 이전에 금융당국과 업계간 충분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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