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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타계한 신영복 성공회대 명예교수를 바로 곁에서 대한 적이 있다. 대학 2학년이던 1995년 3월의 일이다. 95학번 신입생을 위한 행사로 신 교수 초청 특강을 추진했다. 성공회대 연구실을 찾아 정중히 부탁하자 그는 “신세대 청년들이 나 같은 옛날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일까”라면서도 선뜻 응했다.

강연 당일 근처 지하철역까지 마중을 나갔다. 학교로 이동하는 동안 기자가 신 교수의 가방을 대신 들었는데 ‘과잉의전’으로 여겼는지 영 불편한 기색이었다. 이윽고 강의가 시작됐고 당대의 베스트셀러 저자를 직접 본 신입생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김태훈 사회부 차장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988년 9월 초판이 나온 신 교수의 이 책은 대학생들 사이에 필독서로 꼽혔다. 신 교수의 작고 소식을 접하고 20여년 만에 서가에서 책을 찾아 펼쳤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여름 징역은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섭씨 37도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 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인간의 한계, 그리고 공동체의 본질을 정확히 짚은 명문구다.

사실 감옥이야말로 영국 정치학자 토머스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일상화한 공간 아닐까. 증오와 이기심이 판을 치는 곳에서 역설적으로 우정과 연대의 가치를 재확인한 점이 신 교수 책의 미덕이다.

강원 홍천에 사단법인 행복공장이 운영하는 ‘내 안의 감옥’이란 체험장이 있다. 참가자들은 푸른 수의를 입고 교도소와 비슷하게 생긴 5.6㎡(약 1.7평) 넓이 독방에 들어가 며칠을 혼자 보낸다. ‘감방 안에서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자기 내면을 성찰하자’는 취지로 전직 검사인 권용석 행복공장 이사장이 아이디어를 냈다. 확인해본 것은 아니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영감을 얻지 않았나 싶다.

수형자 교화를 뜻하는 교정(矯正)은 흔히 경찰 수사, 검찰 기소, 법원 재판으로 이어지는 형사사법 절차의 종착역으로 불린다. 물론 감옥에서 죗값을 치르고 바른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전제 하에 그렇다.

현실은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형사사법 절차의 마지막 단계는 교정이 아니고 ‘특별사면’이란 생각이 자꾸 든다. 비리로 유죄가 확정돼 정치활동을 못하는 이들이 특사 얘기만 나오면 ‘국민통합에 기여하겠다’고 떠든다. 수감 중인 기업인들은 일제히 ‘경제 살리기에 힘쓰겠다’고 다짐한다. 교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면을 열망하며 바른 사람이 되는 형국이다.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정부의 특사 명단에 오른 전두환 전 대통령이 2년 좀 넘는 수감생활을 마치고 안양교도소에서 풀려났다. 소감을 묻는 취재진에게 그는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여러분은 (교도소에) 들어가지 마시오”라고 답했다. 대통령까지 지낸 인사의 언행치고는 다소 경박하게 느껴진다. 뭐 ‘죄짓지 말자’는 뜻이니 이 또한 감옥에서 한 사색의 결과물로 받아들이면 될까.

김태훈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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