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 지음/글항아리/2만2000원 |
19세기 말 서울에 파견된 프랑스 외교관 ‘모리스 쿠랑’은 우리 고전소설에 대해 이렇게 혹평했다. “한국의 고전소설은 두세 권만 읽으면 전부 읽은 거나 다름없다. 그러하니 우리네 아동용 우화 가운데 가장 졸작보다도 오히려 재미가 없다.”
사실 그렇다. 우리가 어릴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고전물의 결론은 천편일률적이다. 심청전, 콩쥐팥쥐전, 홍길동전, 허생전, 장화홍련전, 흥부전, 숙향전, 전우치전….
고전소설이 지루한 소설로 인식되는 건 엄숙한 해석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효, 충, 열을 강조하는 권선징악적 도덕으로 결론짓는 게 우리 고전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종래 틀을 최대한 벗어나 새로운 독법을 시도한다. 가령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맡겨 아버지의 눈을 뜨게 했다는 ‘심청전’에 대해 달리 생각해보자.
저자는 “심청전은 절대적 명령(효)에 순종하는 심청을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그 명령의 황당함을 드러내는 역설적 텍스트가 아닐까”라고 했다. 아비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제 몸을 던지는 것이 과연 효인가? 작품에서 보듯이 공양미 삼백석을 다른 방법으로 얻을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홍길동전 역시 그렇다. 길동은 다른 세상을 꿈꾸었던 게 아니라, 기존 세계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기를 갈망했다. 율도국을 세워 이상향을 만드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거기까지였다.
옛 고전소설을 보면 그 어떤 시대보다 윤리적 양식과 규범의 힘이 강했던 조선조를 비판하는 늬앙스를 풍긴다.
지배층이 만든 도덕이나 윤리를 거스르는 방향으로 해석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다시말해 지배층이 만들어낸 삼강오륜의 허구를 깨는 소설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보다는 오히려 해학적이고 재미있는 소설들도 많다.
예컨대 17세기에 나온 ‘환관의 아내’를 보자. 그 내용이 파격적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고전소설류와 상당히 다르다. 양갓집 규수였으나 조실부모하여 외숙모와 함께 살던 주인공은 환관(지배층)에게 시집갔다. 하지만 그녀는 야밤에 담을 넘어 도주하면서 결심한다. 첩이 되어 정실과 다투기는 싫으니 중을 골라 따라가야겠다는 것이다. 그녀에게는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가’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성적 대상을 찾아 담을 넘은 것이다.
어느 산중 절간에서 젊은 스님을 꾀어낸다. 그러고선 “아내도 얻고 재산도 얻게 되니 좋은 일 아니냐”며 숲 속으로 끌고 들어가 교합에 성공한다. 이제 그녀의 남편이 된 중이 절에 가 사정을 털어놓으며 파계한다고 고백한다. 놀란 스승이 그들의 집으로 쫓아와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녀는 스승의 뺨을 후려친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본래의 내 남편이었다”고 욕을 한다. 소설의 저자는 결말에서 “환관의 집에 둔 여인들을 모두 풀어주어 젊은 승려의 배필로 삼게 해야 할 것”이라며 파격 제안을 한다. 고전류 가운데 ‘삼강행실도’나 ‘열녀전’을 철저히 따르는 소설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정승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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