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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세종 때도 국민투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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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4-12 22:15:27 수정 : 2016-04-12 22: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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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법개정 민의 물어봐라” 5개월간 투표
여성·노비 빼고 17만명 중 9만여명 찬성
오늘은 20대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일이다. 현대의 민주사회와 전통시대를 구분하는 지표 중 대표적인 것이 국민이 표를 통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는 것일 정도로 투표의 중요성은 크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방식은 아니지만, 586년 전인 1430년(세종 12년)에 세종이 국민투표를 통해 정책을 결정한 사례가 있었음은 무척이나 주목되는 역사적 경험이다.

왕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는 조선시대에 세종이 전 백성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토지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는 새로운 세법인 ‘공법(貢法)’을 추진하면서 세종은 최종적으로 백성들의 찬반 의견을 묻고자 했다. 투표 3년 전인 1427년 세종은 창덕궁 인정전에 나가 과거시험 문제를 내면서 공법에 대한 견해를 묻는 등 세법을 확정하기 전에 미리 분위기를 조성해 갔다. 이 과정에서 세종은 신하와 유생들 의견을 수용했고, 최종적으로 공법 문제는 백성이 결정을 내릴 사안으로 판단했다.

1430년 3월 5일부터 8월 10일까지 무려 5개월간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세종실록’에는 “정부·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前銜) 각 품관과, 각 도의 감사·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閭閻)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 아뢰게 하라(‘세종실록’, 세종 12년 3월 5일)는 투표 관련 기록이 보인다. 호조판서 안순이 “일찍이 공법의 편의 여부를 가지고 경상도의 수령과 백성에게 물어본 즉 좋다는 자가 많고 좋지 않다는 자가 적었사오며, 함길·평안·황해·강원 등 각 도에서는 모두 불가하다고 한 바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자, 세종은 “백성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 그러나 농작물의 잘되고 못된 것을 직접 조사할 때 각기 제 주장을 고집해 공정성을 잃은 것이 자못 많았고, 또 간사한 아전들이 잔꾀를 써 부유한 자를 편리하게 하고 빈한한 자를 괴롭히고 있어 내가 심히 우려하고 있다. 각 도의 보고가 모두 도착하면 공법의 편의 여부와 폐해를 구제하는 등의 일을 관리로 하여금 깊이 의논해 아뢰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위 기록에서 세종은 세금을 공평하게 부과하지 않는 잘못을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천명했음을 볼 수 있는데, 특히 ‘백성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고 천명해 백성의 지지가 없는 정책은 시행할 수 없다는 원칙을 밝히고 있다.

1430년 호조에서는 공법 실시를 둘러싼 투표의 결과를 보고했다. 17만여명의 백성이 참여해 9만8000여명이 찬성하고 7만4000여명이 반대한 것으로 집계됐다. 찬성이 반대보다 14%포인트 정도 많았다. 찬반 상황은 지역별로 ‘세종실록’에 기록됐는데, 경상도와 전라도는 찬성표가 많은 반면 함경도와 평안도는 반대표가 많았다. 당시 인구를 고려하면 17만여명의 국민투표 참여는 노비나 여성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백성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인터넷이나 전화로 의견을 묻는 것이 불가했던 시절에 백성 다수가 투표에 참석하게 하고, 이를 실록에 기록으로 남긴 것은 오늘날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선거날인 오늘 적극 참여해 우리 시대의 민심을 후대에 정확히 남기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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