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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의월요일에읽는시] 어머니학교 43 -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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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9-18 20:14:30 수정 : 2016-09-18 20: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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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1964∼ )

산해진미만 먹어도 목구멍에 가래가 끼고,
독경소리만 듣고 살아도 귓밥이 고봉밥인 거여.
어미가 맘 조리 잘못하고 너한테 쌍소리해서 미안하다.

꽃향기만 맡으며 사는
선녀 콧구멍에도 코딱지 가득할 거여.
하물며 어미는 똥밭에 구르는 쇠똥구리 아니냐?

먹고 싸고 숨 쉬는 게, 도 닦는 거여.
향기도 꿀도 다 찌꺼기가 있는 법이여.
아무 곳에다 튀튀 내뱉으면 어린애지 어른이냐?

자식만 한 거울이 어디 있겄냐?
도 닦는 데는 식구가 제일 웃질인 거여.


이정록 시인 이름을 들먹일 때면 세 가지가 떠오른다. 먼저 홍성의 밤안개다. 2009년 11월 시인의 고향에서 대면한 밤안개는 환상적이었다. 아니 무서웠다. 가로등 아래서 1미터 앞이 보이지 않는 연기속처럼 숨이 콱 막혔다.

또 하나는 그의 언변이다. 잠시도 쉼 없이 호방하게 뱉어내는 그의 말, 필자가 알고 지내는 시인들 중 말발이 가장 셌다. 더 센 무기를 숨기고 있다고 능청 떠는 그의 입담에 곁들이는 술은 거의 말술이었다.

김영남 시인
마지막으로 그의 어머니다. 모자간 나누고 있는 대화를 곁에서 듣고 있자니 어머니의 언어가 보통이 아니다. 이정록 시인은 순전히 어머니의 자질을 물려받아 시인이 됐구나 하고 생각되는 순간이었다.

그후 3년 만에 그는 ‘어머니학교’라는 연작시집을 낸다. 추측컨대 평소 어머니의 빛나는 말씀을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웠으리라 믿는다. 인용시는 거기에 실려 있는 43번째 시다. 어머니의 말씀을 시인인 아들이 단순히 받아 옮긴 것 같지만 그 어떤 표현보다도 시적 리얼리티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이 시집 전체를 누비고 있는 어머니 말씀은 ‘어머니학교’가 아니라 ‘시인학교’다.

김영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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