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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하와이의 태평양 국립묘지는 펀치볼(Punch Bowl)로도 불린다. 움푹 팬 주발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별명이다. 생긴 모양처럼 그저 아늑한 공원 같다. 태평양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숨진 2만2000여명의 전사자 및 가족이 영면하고 있다. 비석은 세워져 있지 않고 뉘여 있다. 부인과 손자 등 가족 이름도 적혀 있다. 장군과 사병 묘지 구분은 없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차별이 있어선 안 된다. 그게 민주주의 가치다.

펀치볼에서 바다 쪽으로 내려가면 진주만이다. 진주를 품은 조개가 넘쳐나던 곳이다. 일본군은 75년 전 1941년 12월7일 선전포고도 없이 공습했다. 그들이 ‘도라 도라 도라(기습이 성공했다)’라고 타전하던 순간, 진주만은 전쟁의 상흔으로 뒤덮였다. 2000여명의 미국인이 사망했다. 애리조나 기념관에는 이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져 있다. 명판은 미완성이다. 아직 생존한 참전 노병들이 있는 것이다. 이들도 숨지면 이곳에 이름이 오른다.

애리조나 기념관은 전쟁의 참혹함을 되새기는 사람들로 붐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그중 한 사람이다. 아베 총리는 27일 애리조나 기념관에 헌화하고 묵념했다. 애리조나함의 연료탱크에선 여전히 기름이 흘러나오고 있다. 기념관에서 바다 밑을 내려다보면 화염에 휩싸여 수장되는 전쟁의 아수라장이 그려져 비감해진다. 전쟁의 아픔은 이렇게 생생하다. 아베는 사과하지 않았다. 중국은 “아베의 영리한 쇼”라고 깎아내렸다. 그러나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니다.

2차 대전에서 미국과 일본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고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다. 일본은 기습했고 미국은 전대미문의 핵폭탄을 일본 두 개 도시에 떠뜨렸다. 서로 감정이 복잡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양국의 두 지도자가 풀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먼저 히로시마를 찾아 고개를 숙였고 아베가 진주만을 찾아 똑같이 했다.

진주만에서 96세의 참전 노병은 아베에게 말했다. “기대 이상이었다. 사죄할 필요 없다.” 2년 전 진주만에서 만난 미국 해군 장성도 그랬다. “조상의 책임을 후손이 사과할 이유는 없다.” 평화를 열어가는 길은 이처럼 가까운 데 있다.

백영철 대기자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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