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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스토리] 차 한잔의 여유주던 자판기 'N포세대' 허탈감까지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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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2-31 14:05:59 수정 : 2016-12-31 14: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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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따라 변화하는 '세기의 발명품' ‘높이 올라간 정상에 나 혼자뿐이라면 너무 춥고 외로울 거야.’

최근 서울 대학로 서울연극센터를 찾은 취업준비생 김모(26)씨가 1층 로비에서 ‘마음치유자판기’(마음약방)에 500원짜리 동전을 넣자 이런 글귀가 담긴 ‘예민성경쟁과다증’ 처방전이 발급됐다. 근래 취업 준비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 마음이 짓눌려 있던 김씨는 ‘마음약방’을 이용했다. 작은 종이 박스엔 마음처방 이용법과 위로 글귀, 도서와 영화 처방, 요리 레시피, 대학로 산책지도 등이 담겨 있었다.

서울문화재단이 지난해부터 서울시청과 대학로 서울연극센터에 운영 중인 ‘마음치유자판기’(마음약방)의 모습. 동전 500원을 넣고 자판기에 표시된 20여가지 마음 증상을 고르면 위트 있는 처방전을 받을 수 있다.
서울문화재단 제공
김씨는 “젊은 세대가 겪고 있는 현실을 위트 있게 위로하는 것 같다”면서 “처방전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기분이 조금은 편안해졌다”며 웃었다.

속칭 ‘자존감바닥증후군’이나 ‘용기부전’, ‘스펙티쉬증후군’ 등 젊은 세대가 공통적으로 겪는 증상 21개에 대한 처방전이 비치된 이 자판기는 지난해 12월 대학로에 설치된 이후 매달 2000명가량 이용하고 있다. 공공예술센터 관계자는 “마음치유자판기는 현대인이 겪는 상처를 치유하는 힐링 프로젝트”라며 “자판기 형태로 만들어 직관적이고 접근성이 높아 ‘재밌다’는 평을 많이 듣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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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기가 변신하고 있다. 사용이 쉬운 데다 사람이 없어도 언제든지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자판기는 ‘세기의 발명품’ 중 하나였지만 수익성 악화로 어느덧 사라지는 추세다. 하지만 ‘마음치유자판기’나 ‘스마트폰 자판기’, ‘금 자판기’ 등 새로운 형태의 자판기가 계속해 등장하며 시대의 변화에 보조를 맞추는 모습이다.

1960년대 유럽에 등장한 시계 자판기에서 시계를 구입하는 모습.
◆자판기, 인류와 역사를 함께 했다


역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자판기는 기원전 215년 그리스에서 등장했다. 물리·수학자 헤론이 만든 ‘기체역학(Pneumatika)’에 현대적 자판기와 비슷한 기술 도해가 있는데, 이를 이용해 이집트와 그리스 신전에서 성수(聖水)를 판매했다고 한다.

지렛대를 이용한 방식으로, 당시 화폐 격이던 드라크마나 금 덩어리를 올려놓으면 그 무게로 열리는 투입구 틈으로 기기 내부에 있던 성수가 흘러내리는 원리였다. 말하자면 ‘성수 자판기’인 셈이다.

자판기는 제품을 판매하는 데 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다. 자연스레 고대나 중세에는 자판기를 만들어야 할 요인이 크지 않았다. 시장경제가 마련되지 않은 데다 노예노동이 일반화돼 현대적 개념의 인건비가 사실상 없었기 때문이다. 자판기는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 시스템이 갖춰지고 자본과 노동이 분리돼 인건비가 급격히 높아지면서 인류사에 본격 등장한다.

‘유인의 무인자동판매기’란 제목의 1976년 4월17일 동아일보 기사. 자판기 옆을 지키는 여성에 관한 글로, 당시에는 기계 옆에서 동전을 바꿔주거나 기계가 고장날 것에 대비하는 인력을 두기도 했다고 한다.
출처=uk.pinterest.com
18세기 영국에서 ‘(코)담배 자판기’가 펍(Pub)을 중심으로 나타났지만 소형으로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등 현대적 느낌과는 거리가 있었다. 1880년대 초에야 영국 런던에서 ‘동전 투입구에 동전을 넣고 상품을 고르는’ 우편엽서 자판기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현대적 개념의 자판기가 나타나게 된다.

이후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오락적 요소(랜덤)를 첨부한 자판기가 등장하는데, 1908년 애덤스 껌 회사의 설립자인 토머스 애덤스가 뉴욕 지하철의 플랫폼에 자동판매기를 설치하고 껌을 판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1935년 코카콜라사에서 음료 자판기를 내놓으면서 현대인에 익숙한 형태의 자판기 문화가 본격적으로 확산한다.

이후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조미료, 샌드위치, 시계, 맥주 등 다양한 자판기가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미국의 중고자동차 자판기나 일본의 산악보험 자판기, 아랍에미리트의 금 자판기 등도 화제가 됐다. 국내에선 올해 초 한 생활용품전문점에서 갤럭시A5, 엑스페리아C3 등을 구매할 수 있는 ‘스마트폰 자판기’를 내놔 눈길을 끌었다.

자판기 관련 책을 쓰기도 한 김지룡 평론가는 “인건비란 요소 때문에 선진국일수록 자판기가 많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유통경로라는 것도 한 이유일 것”이라며 “사실 자판기는 다원화된 현대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쉽지 않지만, 시대가 변화하면서 자판기 역시 변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자판기 확산… 일자리 사라진다?


“이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어렵네….”

서울 종로구의 한 패스트푸드점은 최근 리모델링을 하면서 무인자판기(발권기)를 2대 마련했다. 긴 줄을 기다리지 않고 자판기로 주문하는 것이 가능해졌지만 이곳을 찾는 노년층 대부분은 여전히 직원에게 주문을 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곳을 종종 찾는다는 이모(64)씨는 “젊은 사람들은 기계가 익숙하고 편한지 모르지만 나이 든 사람들은 몇 번을 들어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인근 프랜차이즈 국수집에서도 상당수 손님들은 무인자판기를 낯설어했다. 가게 관계자는 “처음 오는 분들은 식당에서 자판기를 써야 한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이 많다”며 “나이 드신 분들은 ‘와서 눌러 달라’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이들 자판기는 동전, 지폐뿐 아니라 신용카드, 스마트폰으로도 결제를 가능케 하는 등 첨단 기술이 접목되면서 ‘일상 속 기계화’를 보여준다는 분석이다.

독일 뮌헨 지하철역에 있는 레고 자판기의 모습.
이 같은 변화는 앞으로 생활 문화와 일자리 감소에 영향을 미칠 것이란 목소리가 높다. 알바연대 알바노조 관계자는 “자동판매기 시스템을 도입한 기업들에 그러지 말라고 강제할 수는 없다”면서도 “일자리가 줄게 되면 가뜩이나 불안정한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인권이 침해되고 임금상승이 제한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양대 부제만 교수(경영학)는 “조작이 익숙지 않은 세대도 있어 당장 확 바뀌지는 않겠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발권 등 단순 노동은 점점 자판기(기계)로 대체할 가능성이 높다”며 “대면 접촉을 꺼리는 소비자들이 많아지고 기계조작에 익숙한 젊은 세대로 인해 이러한 경향은 가속화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비용절감 효과가 있지만 장기적으로 일자리가 적지 않게 사라진다는 점도 함께 고민해 볼 문제”라고 덧붙였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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