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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하고픈 말을 품고 광장으로 나가다

입력 : 2017-01-20 20:10:53 수정 : 2017-01-20 20: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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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광장 / 광장은 안으로 모여드는 공간이 아니라 밖으로 뻗어가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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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픈 말을 품고 광장으로 나가다


월드컵이 열리던 해 나는 경복궁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시청 앞이 새빨간 티셔츠를 입은 군중으로 가득 찼다는 소식을 듣고 주섬주섬 나가 보니 길은 이미 같은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세종문화회관 앞까지 나갔다가 이미 도로를 가득 메우고 앉은 사람들을 보니 시청 앞까지는 너무나 먼 길인 데다, 그 가운데로 들어가면 도무지 나올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그 무리에 섞일 엄두가 나지 않아 뒷걸음질쳐서 텔레비전 앞으로 돌아갔고, 창문 너머로 광화문 앞에서 노래하는 ‘오래된 코리아’의 함성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큰일이 있을 때마다 장소를 조금씩 달리하며 사람들은 모였다. 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도, 미선·효순이 때도, 광우병 때도, 그리고 지금. 온라인을 통한 소통이 일상화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할 말이 마음에 가득 찬 사람들은 촛불을, 깃발을 들고 광장으로 나간다. 

서울시가 시민의 문화 및 보행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2010년 울창한 은행나무가 있던 중앙분리대를 철거하고 총공사비 354억여원을 들여 조성한 광화문 광장.
모두 알다시피 광장은 정치적인 장소이며 무척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서구의 민주주의는 광장에서 싹을 틔웠으며 광장에서 자라났다. 사람들이 모여서 의견을 나누고 편을 나누고 결정을 하는 하나의 시끄럽고 복잡한 과정이 민주주의의 전통이 됐다. 물론 우리가 속한 동양권의 문화와는 상당히 다르긴 하지만, 현대의 정치적·사회적 환경은 그런 광장에서 만들어진 제도와 시스템으로 굴러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광장이라는 말 속에는 많은 피바람과 많은 아우성이 들어 있다. 그러나 또한 많은 신바람이 들어 있기도 하다.

우리에게 광장은 과연 어떤 의미인가. 우리에게는 시청 앞 광장이 있었고 여의도 광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 광장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역설적으로 민주주의의 가장 반대편에 있는 정치적인 광장이었다. 이를테면 여의도 광장, 강이 보이는 광활하고 건조한 그 광장은 군사정권의 하나의 상징처럼 군림했다. 그곳에서 반공대회를 하기도 하고, 외국에서 온 유명한 전도사의 커다란 복음 성회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고등학생들이 교련복을 입고 줄을 맞추고 행군을 하는 열병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광장은 넓기만 넓고 어디 그늘 하나도 없는 곳이었다. 사실 그곳은 여의도 공항 자리였으며 비상시에는 활주로로 사용이 가능한 곳이었다. 원래 공항으로 사용하던 곳을 60년대 후반 여의도를 상업지역으로 바꾸고 아파트를 조성하고 국회의사당을 옮기는 계획을 시행하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유사시에 활주로로 활용할 수 있도록 놓아두라고 해서 광장이 된 것이다.

그리고 여의도공원으로 바뀌는데, 아직도 그곳에 가면 무언가 광활하여 멀리서 아지랑이 같은 신기루가 보이는 것 같은 아득함이 느껴진다.

“… 황혼을 쫓아 네거리에 달음질치다/모자도 없이 광장에 서다”

도시적인 시를 썼던 시인 김광균의 ‘광장’이라는 시의 마지막 부분이다. 아마 저런 감성이리라 생각한다. 

현상설계에 당선된 기존의 계획안을 무시하고 잔디를 깔아버린 서울 광장.
#잔디 광장으로 둔갑한 빛의 광장


우리에게 광장은 약간은 썰렁하고 허전하고 소통이 되지 않는 그냥 빈 곳이라는 느낌이 굉장히 강하다. 서구에서 들어온 원래의 개념, 즉 광장이라는 넓고 시끄럽고 민주적인 공간이 우리에게 맞는 곳으로 거듭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서울 광장이라 부르는 시청 앞 광장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덕수궁과 시청 사이의 그 빈터는 사람들이 앉아서 쉬는 광장이었다가, 가운데 분수대가 있고 차들이 빙글빙글 도는 로터리형 차도로 되었다가, 2000년대 본격적인 광장이 됐다. 2003년 시행된 현상설계에서 시민들의 메시지를 띄울 수 있는 수백 대의 모니터가 깔리는 미래지향적인 ‘빛의 광장’ 설계안(건축가 서현·인터씨티그룹)이 당선되었다. 

2003년 ‘빛의 광장’이라는 개념으로 당선된 서울 광장 계획안 조감도.
“… 빛의 광장은 축제를 담고자 한다. 시민들의 감수성을 담고자 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연말의 마지막 마디에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면 모니터의 화면이 하나씩 꺼져나간다. 광장은 침묵 속으로 사그러드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 광장 전체는 칠흑같은 어둠으로 덮인다. 그리고 새해가 시작되는 그 순간 광장의 모든 모니터는 한꺼번에 점등된다. 빛의 광장은 순간 화려한 색채의 빛으로 가득해진다. 그리고 그때 보신각에서는 전통대로 종소리가 들려온다. 이것이 빛의 광장이 축제를 담는 방법이다. 이 현장에 동참했던 젊은이들이 훗날 기쁘게 이 현장을 반추할 수 있을 때 이 도시의 진정한 주인이 된다. 이때 이 광장은 빛의 광장을 넘어 우리의 광장이 된다.” - 서현(한양대 교수)

지금은 일상화된 무선 네트워크가 낯설던 때 유리와 수천대의 모니터로 뒤덮인 빛과 정보의 광장을 상상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설치와 공무원의 몰이해와 관련 대기업의 비협조를 견디며 건축가가 실행방안을 궁리하던 와중에, 추진력 과다의 시장이 나타나 하루아침에 계획안은 뒤집혔다.

그곳은 모니터보다는 훨씬 ‘촉촉한’ 타원형의 잔디광장으로 거듭나게 됐다. 그 과정에서 빛의 광장을 지지하던 많은 관련자들은 소외되고 당선안은 조용히 묻혔다. 물론 그 잔디광장은 시민의 품으로 돌아와서 많은 행사들이 열리는 명소가 됐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관제의 물이 빠지지 못한 채 무척 어색하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공연을 하고 스케이트를 지치며 광장의 여유를 만끽하지만, 자연스럽기보다는 마치 스포트라이트가 사방에서 비추는 무대 같다는 느낌을 준다.

미래지향적이며 우리의 정서와 맞는 광장은 무엇일까. 우리에게는 광장이 아닌 ‘장바닥’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저절로 신명이 나고 남의 눈치 보지 않는 그런 장바닥의 왁자함, 그리고 어설픈 사용허가를 구하지 않아도 되는 순수한 자율성만으로 채워지는 사람들의 마당 말이다.

지금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진 촛불집회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면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두 소녀를 추모하기 위한 자리가 있었다. 물론 처음 집회를 제안한 ‘앙마’라는 닉네임의 네티즌이 스스로 한 인터넷 매체에 기사를 써서 선동했다는 지적을 받으며 도덕성에 타격을 입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 뭐라도 하고 싶었던 사람들의 안타까움과 분노를 표현할 길이 열린 것까지 매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초창기에 소규모로 촛불집회가 시작됐던 교보문고 후문 근처는 공교롭게도 조선시대에 부정부패를 행하던 탐관오리에 대한 징벌이 시행되거나, 백성들이 궁 밖으로 행차를 나서다 잠시 길을 멈추는 임금에게 억울한 일을 호소하던 ‘혜정교(惠政橋)’라는 다리가 있던 자리다.

역사는 돌고 돌아 늘 그 자리에 멈추곤 하는가 싶어 놀랍기도 하고 당연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겨레의 멋과 슬기를 찾는 ‘국풍81’ 행사장.
#무엇이 광장을 만드는가


숭례문에서 서울시청을 지나 북악산으로 향하는 세종대로를 지나가다가 차 안에서나 횡단보도에서 잠시 멈출 때면 잠시 한복판에 수호신처럼 이순신 장군 동상으로 눈길이 향한다. 북악산을 등지고 늠름하게 선 그 자태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어서, 몇년 전 동상 정비를 위해 장군이 잠시 벗어놓은 옷을 걸쳐둔 가림막을 쳐놓자 그 재치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상실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뒤로 훨씬 큰 체구의 누런 색 세종대왕이 앉아 자애롭게 우리를 품어 안아주지만 너무 과한 스케일 때문에 포근하다기보다는 부담스러운 느낌이 든다. 세종대왕을 등지고 광화문 쪽으로 좀 더 다가가면 광장이라고 이름 붙여놓고 굳이 심어놓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잔디밭이 나오고, 건너편 광화문을 지키고 선 해치를 보고 있자면 예전에 김승호라는 배우가 나오는 영화 ‘마부’에서, 아들 역의 신영균이 사법고시에 붙고 눈이 오는 광화문으로 아버지를 찾으러 가던 장면도 문득 떠오른다. 복원된 지 벌써 꽤 시간이 흐른 경복궁 전각들의 지붕선 너머로 용의 얼굴 같은 형상의 북악산이 비껴보고 있다. 지난 몇 달간 유난히 뉴스의 배경이 되었던 풍경이다.

서울시가 시민의 문화 및 보행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울창한 은행나무가 있던 중앙분리대를 철거하고 총공사비 354억여원을 들여 ‘광화문 광장’(삼우설계·서안조경)을 만든 것이 2010년의 일이니 그것도 벌써 오래된 일이다.

“탁월한 조망과 역사성을 면면히 이어온 광화문 거리의 잠재력을 다시 살려내고, 흔들렸던 국가 중심축을 바로잡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특히 전통공간의 재현 및 복원은 조경에서 아주 중요했다. 광화문광장의 설계 모티브는 국가의 상징 축인 ‘북악산-정궁-황토현-연주대’ 축의 복원, 월대 표현, 해치성 원위치, 육조거리 축 복원, 황토현 재해석, 중학천과 백운동천의 과거 물길 재해석 등이다. 이는 바로 우리의 정체성 회복이 시작됨을 의미한다.” - 신현돈(조경설계 서안 소장)

그 과정에서 16차선 도로는 10차선으로 줄여서 차가 막힌다고 난리가 났고, 양쪽 도로로 단절된 섬 같은 그 공간이 과연 광장이 맞느냐고 또 난리, 그리고 ‘불투수층’을 잔뜩 만드는 바람에 진짜 물난리가 나서 투수 보도블록으로 바꾼다고 해서 다시 난리를 겪었던 광장.

무엇이든 자꾸 보다 보면 정이 든다는 것이 디자인 개념이었던지, 처음에는 ‘밉상’이었던 광화문 광장은 세월이 지나며 조금씩 익숙해졌고, 세종로 거리를 지하도를 통하지 않고도 지상으로 건너다닐 수 있게 해준 것은 심지어 고맙기까지 한 일이었다.

아무리 우리에게 공간을 만들어주고 그 앞에서 마음껏 놀아보라고 해도, 마음이 가지 않으면 그 공간은 죽은 공간이다. 그냥 허울만 좋은 광장일 수밖에 없다. 광장은 울타리 안으로 모여드는 공간이 아니라 경계 없이 밖으로 한없이 뻗어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무척 역사적인 해였던 2016년, 아무렇게나 만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었던 서울 광장과 부여된 거창한 의미에 비해 결과물은 미심쩍었던 광화문 광장, 지극히 인위적인 광장이 사람의 광장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목격했다. 아니 목격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예외없이 모두 나라를 걱정해야 하고 미래를 걱정해야 했다. 세상의 이목을 걱정하며 ‘창피해서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 되자, 사람들은 누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집에서 걸어 나와 죽어 있는 너른 터에 영혼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그곳은 진정한 광장이 됐다.

아무도 시킨 사람 없는 순수한 시민들의 자율적 의지와 에너지가 자동차로 가득했던 대로에서, 가게들이 늘어선 골목길에서, 지하철에서 오르는 계단에서, 그리고 또 마음속 뜨거운 어딘가에서 사람이 모이고 사람을 담는 하나의 거대한 물결이 굽이치는 그런 광장을 열었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그들은 그 집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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