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랑의 약속이다. 신부가 화답한다.
“남편이 스포츠 중계를 볼 때는 리모컨을 순순히 양보하겠습니다.”
지난 4일 부산 A호텔에서 ‘백년가약’을 맺은 이준혁(30)·오보은(30) 커플은 하객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혼인서약서를 읽어 내려갔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라고 기원하는 주례는 없었다. 결혼식은 신랑 신부의 재치 있는 혼인서약, 양가 부모님의 편지, 커플의 연애 과정을 옆에서 지켜봐온 친구의 유쾌한 축사로 이어졌다. 이씨는 “영상이나 축가 등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했는데, 주례까지 있으면 결혼식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았다”며 “다른 결혼식에서 봤던 주례사가 지루했던 것도 고려했다”고 주례를 뺀 이유를 설명했다. “부산까지 와 달라고 부탁할 만한, 우리 두 사람을 잘 아는 어른이 없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덧붙였다.
결혼식에서 빠질 수 없다고 여겨온 주례가 없는 결혼식이 늘고 있다.
신랑 신부와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작고 재밌는 결혼식에 대한 욕구가 늘고 있는 데다 결혼 연령이 올라가면서 주례로 모실 만한 어른들과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게 쉽지 않은 사정도 작용한다.
웨딩 컨설팅 업체인 아이웨딩은 지난달 82쌍의 주례 없는 결혼식을 치렀다. 전체가 900여 쌍이라는 점에서 큰 비중은 아니지만 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종현 홍보제휴팀장은 14일 “2014년에 비해 2015년에 주례 없는 결혼식이 7% 증가했고 지난해에는 9.7%가 늘어난 것으로 파악됐다”며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주례 없는 결혼식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회자를 제공하는 업체를 보면 이런 상황이 더욱 분명하다.
결혼식 전문 사회자 업체인 나인컬렉션 윤우람 대표는 “우리 회사는 주례 없는 결혼식이 8대 2 비율로 더 많다. 주례 없는 결혼식에서는 사회자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 같은 업체를 찾는 비율이 높다”고 설명했다.
‘지루한 주례사’는 많은 커플들이 주례 없는 결혼식을 택하는 이유다.
결혼 2년차에 접어든 김모(34)씨는 “내가 하객으로 갔을 때 주례사 시간이 너무 지루했다. 그래서 주례 없이 결혼식을 치렀다”고 말했다.
주례를 맡길 만한 어른들이 마땅치 않은 것도 큰 이유다. 취업 준비 등으로 평균 결혼 연령이 30대 초·중반으로 올라가면서 대학 은사 등과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이어가기 힘들어진 것이다.
지난해 12월 결혼식을 올린 민모(33)씨는 “대학 때부터 연애하여 결혼을 했기 때문에 학과 교수님을 모셔도 됐지만 주례 부탁을 할 정도로 친분이 있는 교수님이 없었다”고 전했다.
주례를 뺀 젊은 커플들은 유쾌한 파티 형식의 결혼식을 진행한다.
오는 4월 주례 없는 결혼식을 올리는 예비 신랑 이모(40)씨는 “주례가 있으면 신랑 신부가 내내 주례만 쳐다보다가 끝날 때가 되어서야 하객들한테 인사를 하는 게 싫었다”며 “하객들을 바라보며 최대한 교감하고 지인들과 함께 재밌게 즐길 수 있는 결혼식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남정훈 기자 ch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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