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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고개 아리랑-국가의 토지강탈 의혹 사건] 박정희 대통령 지시, 중정·검찰서 ‘작전’… 사기꾼 몰아 땅 몰수

입력 : 2017-02-15 19:13:30 수정 : 2017-02-15 19: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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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보도] 4회-토지 및 재산 강탈 또 있었다 / 구로공단 농지 어떻게 뺏었나 현대사의 모든 순간이 그랬듯 1970년의 시곗바늘도 바삐 돌았다. 포항제철이 첫 삽을 떴고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됐다. 와우아파트는 무너졌고, 청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부르짖으며 분신했다.

그해 7월5일 오후 10시쯤. 갓 잠에 빠진 서울 구로동과 독산동, 가리봉동 일대 농촌 마을에 경찰관들이 들이닥쳤다. 영문도 모르고 잠옷 바람으로 끌려간 농민 60여명은 감금된 지 며칠이 지나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은 ‘토지 사기꾼’이 돼 있었다.

수사당국은 다짜고짜 이들이 살고 부치던 토지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포기하라고 강요했다. 관련 민사소송은 이미 2년 전에 대법원에서 승소로 끝난 터였다. 이 과정에서 구타와 가혹행위, 회유, 협박이 뒤따랐다. 끝내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던 농민들은 사기 혐의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지금은 대부분 고인이 된 피해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억울함에 눈을 제대로 감지 못했다.
농지 강탈 피해자와 유가족들 지난 9일 서울 구로구 ‘구로군용지사건명예회복추진위원회’ 사무실에서 구로공단 농지 강탈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재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분배받은 농지가 구로공단 부지로

1942년 일본 육군성은 경기 시흥군 동면(현재 구로동, 독산동, 가리봉동 일대) 농민들이 경작하던 논밭을 강제수용해 육군성 명의로 등기했다. 등기가 일본군으로 넘어갔지만 실제 군용지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민들은 경작을 이어갔다.

해방 후에는 토지가 농민들에게 분배됐고 농지개혁법에 따른 상환곡(농지를 분배받은 농민이 그 농지값으로 정부에 상환하는 곡식) 납부도 이뤄졌다. 1950년대 국방부에서 이 땅이 일제강점기 군용지였다며 소유권을 주장해 상환곡 납부가 보류된 적이 있었지만 계속 농지로 사용됐고 등기부상에도 전·답으로 유지됐다.

이 땅에 비극의 씨앗이 심어진 것은 1961년이었다. 박정희정부는 산업진흥 및 난민정착구제사업 계획을 세운 뒤 경작하던 농민들을 쫓아내고 서울시에 구로수출산업공업단지(구로공단·현 구로디지털단지)를 조성하도록 했다. 공단 주변에는 간이주택 등을 지어 청계천 난민 등에게 불하해 공단 노동력을 충당하기로 했다. 이미 주인이 있는 땅을 이중으로 불하한 셈이다.

이에 원주민들은 1964년 모두 9건의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서울시는 그제서야 이 농지가 “분배대상 착오에 의해 잘못 분배된 것”이라며 뒤늦게 농지분배를 취소하는 행정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법원은 소송 진행 초기 영등포구청·서울시청·농림부 농지담당 공무원 등의 “농지분배가 적법하게 이뤄졌다”는 증언을 받아들였고, 재판장이 직접 관할청을 방문해 현장 문서를 검증한 뒤 농지가 분배된 사실을 인정하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1968년 3월19일 대법원도 원고 측 승소판결을 내렸다.

당혹스러워진 당국은 공무원들을 겁박했다. 대법원 판결 4일 뒤 서울지검은 농지분배서류가 조작됐다며 “농지분배된 사실을 알고 있다”고 증언한 농림부 농지담당 공무원을 구속하는 등 각급 기관 농지담당 공무원들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4월 대법원은 다른 소송에서도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때도 3일 후 담당 공무원들이 구속됐다.

이 같은 수사당국의 무리수는 구로공단 조성이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단계였던 데 따른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정부는 민사소송 진행 여부와 관계없이 1968년 구로공단에 입주할 업체를 지정하고, 단지 내 전자공업진흥원 발족을 계획하는 등 공단 조성에 매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착착 진행되는 공단 계획과는 달리 대법원에서는 원고 승소 판결이 이어졌다.

#대법원 판결에도 대통령 말에 뒤집혀

일이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나중에 땅을 불하받은 이주민들이 쫓겨나게 될 판이었다. 이들은 1970년 4월 집단시위를 벌였다.

이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같은 달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고, 곧 대통령비서실 산하 제2지방행정실이 ‘서울시 구로동 대지 분규 보고’를 올렸다. 보고서에는 총 9건의 민사소송 진행 경과(정부 패소 4건, 계류 3건, 정부 승소 2건)와 검찰 수사 진행상황 등이 담겼다. 박 대통령은 보고서 결재란 밑에 친필로 ‘법무부장관으로 하여금 정부 측이 패소되지 않도록 가능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적었다. 김정렴 비서실장은 옆에 ‘법무부장관에게 연락 필’이라는 메모를 덧붙였다.
대통령비서실서 작성한 보고서 1970년 4월29일 대통령비서실에서 작성한 ‘서울시 구로동 대지분규 보고’ 문건. 박정희 대통령은 5월13일 이 보고서를 결재한 뒤 친필로 “법무부장관으로 하여금 정부 측이 패소되지 않도록 가능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적었다(오른쪽 빨간색 사각형 부분). 왼쪽의 “법무장관에게 연락필”은 비서실장이 덧붙인 것이다.

비슷한 시기, 중앙정보부는 공작에 돌입했다. 중정은 “농민과 공무원이 결탁해 군용지를 가로채려 한다”는 제보를 받고, 검찰이 수사 중인 사안임을 알면서도 감찰실 수사관들을 보내 제보자 3명을 조사했다. 제보자라고는 하지만 중정이 기획한 이들이었다. 중정은 “민사소송에서 정부가 이길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면 거액의 보상금을 준다”고 회유했고, 제보자들은 중정의 ‘교육’에 따라 법정에서 “농민들이 농지를 분배받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농지개혁이 실시된 1950년은 제보자가 11세 때로, 농지개혁을 알 만한 나이가 아니었음에도 증언은 결정적 증거로 채택됐다.

서울지검도 68명을 사기·위증 혐의로 체포하고 240명을 수배하면서 전면 재수사에 착수했다. 1968년 무혐의·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불구속기소 상태인 이들까지 대거 체포·구금했다. 이렇게 잡아들인 농민들 중 민사소송을 취하하거나 대법원에서 확정된 민사사건의 권리를 포기한 105명은 석방됐지만 3일이 지나도록 권리를 포기하지 않은 53명에 대해서는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법원에서 영장이 기각되자 담당 검사는 영장담당 판사가 아닌 부장판사를 통해 영장을 재청구, 발부받기도 했다. 이후 검찰은 민사소송을 포기한 이들을 추가로 석방시켰지만 끝내 권리를 포기하지 않은 이들은 사기 또는 위증죄로 구속돼 옥살이를 했다. 한경택(1989년 사망)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지시는 짧았지만 고통은 길었다

“아버지는….”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채 한 문장을 말하지 못하고 여든을 바라보는 노인의 목이 메었다. 대통령의 한 줄짜리 지시는 간단하고도 명료했지만 피해자들의 고통은 대를 이어 수십년째 이어졌다. 
한동익씨.
한씨의 아들 동익(77)씨는 아버지가 “땅을 빼앗긴 것은 그렇다쳐도 사기꾼으로 몰리는 것이 너무 억울하다”며 울분을 토했다고 전했다. 한밤에 붙들려갔을 때 58세였던 한씨는 형기를 마치고 나온 뒤 급격히 쇠약해졌다.

조사 과정에서 여러 번 가혹행위도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 결과와 피해자 진술 등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벌거벗겨져 무릎을 꿇린 채 조사받았다.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으면 슬리퍼로 뺨을 맞거나 무릎 위를 발로 찍히며 “그러다 죽을 수도 있다”는 위협을 받았다. 피해자들은 창문이 없는 좁은 방에 수십명을 가두고 대소변도 자유롭게 볼 수 없어 무척 괴로웠다고도 전했다.


동익씨는 아버지가 억울하게 당하던 생각을 할 때면 끓어오르는 울분을 삭이지 못해 한겨울에도 옷깃을 열어젖히고 부채질을 했다고 회상했다. 한경택씨는 1989년 아들을 조용히 불렀다.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너희는 사기꾼의 자식이고, 너희 아이들은 사기꾼의 손주가 되는 것이다. 네가 꼭 이 허물을 벗겨다오.” 그는 당부를 남긴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물에 몸을 던졌다. 19년 전 한밤에 끌려갔던 7월이었고, 그때처럼 러닝셔츠 차림이었다.

그렇게 피해자들이 하나둘 세상을 뜨면서 모든 사건이 끝나는 듯했다. 이 같은 사연들만이 ‘한강의 기적’을 낳은 수출의 성지로 꼽히는 구로공단을 떠돌았다.

#규명된 ‘진실’, 요원한 ‘화해’

진실 규명의 기회는 30여년이 지난 뒤에야 찾아왔다. 노무현정부 때인 2005년 과거사특별법이 공포됐고, 같은 해 대통령은 8·15경축사를 통해 “국가범죄로 인한 피해자에게 보상과 명예회복을 해줘야 한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2007년 ‘구로 분배농지 소송사기 조작의혹 사건’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고, 이듬해 7월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 당시 진실화해위는 권리행사를 방해받은 피해자들에게 사과할 것과 무리한 기소로 유죄판결을 받은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위해 재심 등의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권고에 따라 민·형사 재심이 시작됐다. 우선 유죄판결을 받은 26명 중 23명은 형사재판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돼 사기꾼이라는 멍에를 내려놨다. 피해자들은 이 판결을 근거로 정부가 이긴 민사소송 재심에 대한 재재심을 청구했다. 지난해 1월 대법원은 재심의 국가 승소판결을 취소하라고 확정했다. 확정 판결이 재심에서 뒤집힌 경우는 자주 있었지만 이처럼 재심 판결을 취소하는 재재심이 확정된 것은 사법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손해배상청구소송이다. 판결이 모두 확정되면 정부는 수천억원 이상의 배상 부담을 지게 된다. 그래서인지 이 소송들은 진전이 없고 현재 대법원에 계류된 재판만도 5건인 것으로 전해졌다.


손해배상 재판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서울남부지검은 2014년 우모 전 진실화해위 조사관을 공문서변조 등 혐의로 기소했다. 2007년 진실화해위 조사 당시 우 조사관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임의로 진실규명 결정문을 수정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해 서울남부지법은 “변조의 고의나 위법성 인식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이에 불복해 항소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애초에 무리한 기소였다”며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끝내 진실은 밝혀졌지만 아직 화해에는 이르지 못했다. 사건 발생 당시 가장 젊은 축에 속했던 피해자 박준용(81)씨는 “순리대로 해결되는 것을 보고 가는 게 생에 남은 마지막 소원”이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특별기획취재팀=김용출·백소용·이우중·임국정 기자 kimgija@segye.com
영상편집= 김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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