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차인이 건물을 빌려 쓴 부분에서 화재가 일어나 건물 전체가 타버렸더라도 건물 주인이 임차인의 부주의나 과실을 입증하지 못하면 임차한 부분 이외의 피해는 배상할 필요가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처음 나왔다. 이는 임대차계약의 본질과 증명책임 분배의 취지에 부합하도록 임차인의 책임 요건을 명확히 한 것으로, 종래 임차인의 책임을 넓게 인정해 온 대법원 판례를 변경한 것이다. 임차인과 세입자 등 경제적 약자의 배상책임을 덜어준 전향적인 판결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19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전날 경기 광주의 한 상가건물 주인 김모(68)씨가 세입자 박모(42)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원고 패소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김씨는 2009년 10월 원인불명의 화재로 자신의 상가 건물이 다 타버리자 “임차인 박씨가 골프용품 판매장으로 빌린 부분에서 불이 났다”며 박씨에게 임차구역뿐만 아니라 건물 전체의 피해 배상을 요구하며 소송을 냈다.
1심은 “화재가 박씨가 임차한 부분에서 발생했다는 증거가 없다”며 세입자 박씨 손을 들어줬다. 반면 2심은 “임차인이 주의 의무를 다했다는 점을 증명하지 못하는 이상 임차한 부분뿐만 아니라 임차 외 부분의 화재 피해까지 배상해야 한다”며 건물주 김씨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임차인이 보존·관리의무를 위반해 불이 나 임차한 부분 이외의 건물까지 피해가 발생했다는 점을 임대인이 증명한 경우에만 임차인이 손해배상 책임을 진다”며 1심이 옳다고 최종 판단했다. 이어 “임차인이 주의 의무를 다했음을 증명하지 못하는 이상 임차 외 건물 부분까지 화재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종전 판례는 모두 변경한다”고 덧붙였다.
이번 판결은 화재사고 관련 보험금 지급 및 구상 실무에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구체적으로 임차인과 세입자의 책임은 완화되는 대신 건물주의 화재 방지의무나 대책은 한층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피고 측 대리인을 맡아 승소 판결을 이끌어낸 법무법인 지평 배성진 변호사는 “앞으로 원인불명의 화재가 발생한 경우 임차인은 임차한 부분에 대한 선관주의의무를 다하면 책임 확대를 막을 수 있어 임차인의 보험자가 화재 발생과 관련해 임대인에게 직접 지급해야 할 보험금도 상당 부분 감소될 것으로 보인다”며 “반면 임대인은 건물 전체의 소유자로서 화재 발생 및 확대를 막기 위하여 적절한 보험상품 가입을 비롯한 주의의무를 더욱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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