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까지만 해도 북한은 핵실험과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를 거듭하며 미국 본토를 타격할 능력이 있음을 과시했다. 미국은 핵추진항공모함과 전략폭격기 등 전략자산을 한반도에 전개하는 한편 해상차단과 인력 송출 금지 등 전방위 압박, 제재를 이어가며 벼랑끝 대치 국면이 격화됐다. 이 과정에서 “로켓맨” “늙다리 미치광이” 등 거친 설전도 이어졌다.
하지만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한반도 정세가 대화 국면으로 전환되면서 국내외 정치 지형에도 지각변동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북풍(北風)에 의존해 왔던 자유한국당과 일본 아베 신조 정권은 갑작스런 국면 전환을 맞아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북한에 속지 말자”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지만 새로운 어젠다를 제시하지 못할 경우 대화 국면에서 ‘패싱’을 당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홍준표 “남북 평화 사기극 놀아나면 안돼”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1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정은이 또 한 번 핵 폐기가 아닌 핵 중단을 이야기하면서 벌이는 남북평화 사기극에 놀아난다면 대한민국의 안보는 누란의 위기로 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자유한국당 훙준표 대표. 연합뉴스 |
정태옥 대변인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1주년 논평에서 “정부는 천안함 폭침의 전범인 김영철의 방남을 허용했고, 거짓말을 일삼는 북한 김정은의 가짜평화 약속과 장밋빛 전망에 들떠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자유한국당의 이같은 반응은 남북, 북미 정상회담이 안보문제에 메가톤급 영향을 주는 이슈라는 것과 무관치 않다. 자유한국당은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평창 동계올림픽을 평양 올림픽이라 칭하고 김여정, 김영철 방남을 비난하며 현 정부를 ‘안보 무능 정권’으로 규정하는 등 대여 공세를 강화해 보수 결집을 꾀해왔다.
그런데 남북, 북미 정상회담으로 한반도 정세가 평화 모드로 급변하자 전략에 차질이 생겼다. 북풍몰이에 올인하던 상황에서 평화국면이 이어지면 색깔론을 내세울 수 없어 존재감이 약해진다. “북한은 늘 말을 바꿔왔다”며 비난을 지속하지만 미국도 1994년 제네바 합의 등 빌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과 합의한 사항을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 뒤집은 전례가 있다. “정상회담은 문재인정부를 도와주려는 북한의 기획”이라는 주장도 지난해 문재인정부 출범 당시 우리측의 대화 제의를 묵살하고 핵과 미사일 발사 시험을 거듭해 국내 보수진영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던 것을 감안하면 ‘내로남불’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북풍으로 먹고살았던 日 아베 “어쩌나”
대북 압박을 주장하며 적지 않은 이익을 챙긴 일본 아베 신조 정권은 ‘재팬 패싱’(일본 배제) 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10일 “북미 정상회담으로 북한 압박을 주도했던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불안이 제기되고 있다”고 전했다.
아베 총리는 지난해 10월 중의원 선거에서 북풍몰이 전략으로 압승했다. 지상형 이지스 시스템인 이지스 어쇼어 배치, 항공모함 확보, 미사일 경보 시스템 구축 등 군사력 증강에도 적극적이었다. 일본을 ‘전쟁이 가능한 나라’로 만들기 위한 개헌 작업에도 북풍을 활용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연합뉴스 |
일본이 한반도 문제에서 주변국으로 밀려날 조짐도 감지된다. 우리 정부의 대북 특별사절단 방북 결과를 중국, 러시아에 설명하기 위해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파견되는 반면 일본은 서훈 국정원장이 방문할 예정이다. 서 원장은 정보 전문가다. 어떤 정보를 공유해야 국익에 이로운지를 잘 아는 사람이다. 대북 특별사절단 방북 결과에 대해 일본, 미국, 중국, 러시아 간에 정보 불균형이 발생할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북한 핵과 미사일 위협 대응을 이유로 한일 군사교류 강화 등을 주장했던 것도 빛을 바랠 가능성이 있다.
정부 소식통은 “문재인정부가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주석을 만나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치켜올리며, 신(新)북방정책을 앞세워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하는 반면 일본에 대해서는 3.1절 기념사에서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는 등 냉랭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며 이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한반도 정세에서 일본의 역할은 갈수록 줄어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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